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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회

부끄러움의 페미니즘

살짝 유행 지난 유원지처럼 약간 쓸쓸하게 느껴지는 페이스북이란 공간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것은 글의 힘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백색 사이로 간간히 뻗쳐 나오는 말의 힘에 대한 믿음을 놓을 수 없었다.


14일 신촌에서 있었던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만취 퍼포먼스 시위에 대한 기사를 타임라인에서 보고 스크롤을 내리다가 한 개의 글을 봤다. 글은 담담해서 먹먹했다. 쏟아지는 죽비처럼 아픈 글들 중에는 모든 것이 페미니즘의 영역으로만 귀결됐던 베일 뒤편의 여성들의 살아있는 분노가 있었다.

 

도래 이래 과민반응처럼 여겨져 왔던 페미니즘에 ‘메르스 갤러리’란 이름이 덧붙여진 이래로 페미니즘에는 (성차별에 대한) 미러링이라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여자 일베’라는 낙인마저 덧씌워졌다. 과하고 공격적인 발언과 성차별, 폭력적인 발언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지탄을 받았다.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과 아동 성애적 발언은 왜곡되어 전달 돼 순수성에 대한 의심에 기름을 부었다. 기존의 여성운동에 대해 온건 미지근했던 남성들조차 다소 호전적인 메르스 갤러리, 메갈리아에 대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얘기 하면 그건 메르스 갤러리나, 메갈리아의 방식이 잘못돼서 그렇다는 말로 이야기는 쉽게 귀결되곤 한다. ‘온건한 남성들’은 그들의 방식은 잘못됐으니 우리가 지지할 수 없다란 말로 ‘올바르지 못한’ 방식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남성우월적, 여성비하적 사고관을 혐오하며 다소 친-페미니즘적이었던 남성들조차도 ‘기형적’인 여성주의 운동은 안 된다는 말로 중도를 찾고자 했다. 거친 언사와 행동들에 대해 일부 여성들조차 메갈리아는 ‘역겹다’며 동조의 뜻을 내비췄다. 여성들조차 지지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행위들이라면, 남녀 할 것 없이 대다수가 거부감을 느낀다면 급진적인 이들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편이 아직 의식개혁이 덜 되어서라고 말하는 것보다 합리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웹툰에 대한 지적들이 과도하다며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작가들을 옹호하면서 지적한 이들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들을 쏟아내는 이중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않는다. ‘숙크러쉬’를 외치면서도 내 여자친구, 내 아내는 드세면 안 돼라는 말에 거리낌이 없다. 성차별적 발언 이후에도 유쾌하고 지적이라는 면죄부로 더욱 더 승승장구하는 개그맨들을 티비에서 보고 웃으면서 여성 커뮤니티 사람들 때문에 즐거움을 잃었다며 혀를 찬다. 여성의 성 상품화라며 ‘열폭’하는 이들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의 열등감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 여성의 권리는 신장되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을 지켜서 정도 안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다. 이에 관한 한 보수적 남성도, 진보적 남성도 별 차이가 없을 때가 있다. 그 사이 원색적 포장지들 사이에 감춰져 있던 진짜 아픔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감각해졌다.

 

그렇게 남자들은 성추행과 성폭행과 여성 폭력적 발언들과 차별들은 척결해야하지만 나와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 일로 여겨왔다. 13세 아동을 성적 노예화한 게임에 대한 소개를 맥심은 여전히 그들의 잡지에 버젓이 싣는다. 자유를 항변하며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던 소라넷은 다시 음지에서 독버섯처럼 퍼지며 수많은 ‘골뱅이’들을 찾는 음흉한 하이에나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다. 양보해서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성차별적, 성폭력적인 일들을 접어두고 생각한대 해도,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일들에조차 일말의 죄책감마저 깃들어있지 않다. 명절의 ‘남성’은, 데이트 중의 ‘남성’은, 가족과 사회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회인 ‘남성’은 과연 이 원죄에서 나만큼은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방조 또한 폭력이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글을 쓰는 ‘나’ - 21세기의 한국남성 - 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가사일을 하며, 여성의 권리를 신장해야 한다고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조차도 과격한 언행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적개심만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넘겼다. 그것은 ‘내’가, 항상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면서 사회적 불편함과 부당함을 느끼는 이유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라는 경험을 공유할 수 없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수많은 목소리들 - 기존의 여성운동들부터 메갈리아에 이르기까지 - 을 그저 넘기기만 한다면, 그것이 나의 ‘경험’으로 치환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감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 살 수 없는 이상, 나는 완벽히 이해했어라는 말은 오만에 불과하다. 연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좀 더 용감하면서 문제를 인식한 ‘남성’인 누군가는 함께 뛰어들어 싸울 수 있겠지만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자는 말도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동의하는 성평등주의자인데 나한테까지 굴레를 씌우냐며 억울해할 수많은 ‘깨어있는 남성들’한테 말하자면, 내 자신을 포함한 우리는 결코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느낄 불편함이 우리의 몫이 아닌 한, 그 또한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도 나는 메갈리아식의 -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입장차는 조금씩 다르지만 - 여성운동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여느 보통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그 ‘개그맨’이 나오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고 웃으며, 다소 과격한 표현들과 비판에 대해 과하다는 생각을 하며 바라볼 때도 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 ‘남성’적 사회구조에서, 여당 여성 최고위원조차도 “여자가 너무 똑똑해 보이는 안 돼”라는 말을 하는 이 사회에서 너무 오랫동안 길들어진 탓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의 탓만으로 돌릴 생각도, 그렇다고 내가 한 일이 아니라며 거부할 생각도 없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 받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 논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항변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생각해봤냐는 것이다. 나의 죄도 아니고,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니지만, 동시의 나의 잘못이기도 하다. 사실 설령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무의식에 박혀있을 모든 것들을 결코 뿌리 뽑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이 불편함을 끌어안고 살고자 한다. 이 가슴 먹먹하게 아픈 부끄러움만이 온전한 공감도 완벽한 연대도 불가능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by 9.

 

* 사진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