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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정치

청년의 분노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석패하긴 했어도 버니 샌더스가 가진 49.6%의 지지율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모두가 힐러리 클린턴의 압도를 예상했을 때, 버니는 고작 0.2%의 차이만을 보였을 뿐이다. 말 그대로 “Feel the Bern”이다. 버니 샌더스 ‘현상’이라도 부르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현상의  특징은 만 74세라는 비교적 고령의 나이임에도 그를 지지하는 지지층들이 20, 30대 젊은 층이라는 점이다. 가장 노령인 그가 내세우는 정책이 역설적으로 가장 젊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사회주의자(사민주의자)인 그의 정책은, 기존의 미국 대선의 정치인들이 사용하던 정치 문법들에 비해 급진적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으로만 보였던 미국 상위 1%의 아성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그의 언행엔 거침이 없다. 샌더스의 승승장구는, 샌더스 본인의 힘을 넘어서는 그 무엇의 파도에 얹혀 있다. Occupy Wall Street 운동 이후로 잠잠한 것으로만 보였던 청년들의 분노가 그 기저에 있다.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쯔위 사태로 한국 사회에도 파장을 끼쳤던 대만 총통 선거에서의 승리 요인도 결국 청년들의 분노에서 비롯됐다. 한국의 88만원 세대와 같은 맥락으로 쓰이는 22K 세대(한화 79만원 정도 되는 청년들의 초봉을 빗댄 표현)가 주축이 됐다. 한국의 헬조선 표현처럼 스스로의 나라를 귀도(귀신섬)으로 불렀던 대만 청년들의 분노가 압도적인 차이로 대만 정권을 바꿨다. 대만의 학생운동인 해바라기 운동 세력이 주축이 된 시대역량이 불과 1년 만에 5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정계에 진출한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사토리 세대로 불리며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해 9월 집단 자위권 법안의 가결 전후로 한동안 벌어졌던 일본 청년 단체 SEALDs(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의 반대 시위는 60~70년대 이후로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일본 청년들의 집단적 행동이었다. 정치 혐오와 무관심이 팽배한 것으로만 알려졌던 일본의 청년들마저 행동했던 것이다.

 

분노한 청년들이 행동을 시작한다. 비록 시간차를 두고 각자의 입장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모두가 예상했던 청년들의 무기력한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젊은 층의 지지는 호전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상황에서도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답이 없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대답이다. 대만 젊은 청년층의 분노는 그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꾸는 것까지 그들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던 일본의 청년들조차 6000명이 한꺼번에 힘을 모을 수 있다는 역량을 보여줬다. 잠재적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들조차,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 청년층의 현실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지나칠 정도로 부합한다. 2015년 청년실업률은 9.2%에 육박했다. 헬조선,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와 같은 청년들의 절망을 담은 단어가 2015년을 관통했다. 정치인들은 이재명 성남 시장의 청년배당과 같은 청년 정책들은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 정책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창조경제, 스타트업 지원과 같은 정책들은 그 실체가 불분명한 채 유령처럼 한국사회를 배회한다. 정부는 광고들까지 전면적으로 배치해가며 경제 활성화 법안들을 선전하지만, 이들 법안이 가져다 줄 미래의 모습은 청년의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2016년 한국 정치에 있어 여전히 청년 정치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청년층의 지배가 주요 기반인 야권의 정치 개혁의 축마저 김종인과 윤여준과 같은 70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새정치를 하겠다는 국민의당에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에도 주목 받는 청년 정치인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나마 새누리당에서 청년의 이름으로 회자되는 정치인도 티비 매체 출연으로 이름을 알린 이준석이나, 외모만으로 SNS 상에서 회자되는 조은비 예비후보 정도다. 정의당 조성주와 같이 자신의 정치적, 정책적 포부를 내세우는 청년 정치인들을  찾기도 어렵고, 그마저도 언론에서 언급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이를 청년의 투표율이 저조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말이 많다. 일정 부분 사실인 점은 있다. 20,30대의 투표율은 40대 이상 투표율에 비해 낮은 경향을 띄고 있다. 60,70대의 투표율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 명확하다. 그러나 인구 구성 비에서 20~30대의 비중이 적어지는 현 구조에서 모든 책임을 단순히 청년의 투표율에만 묻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청년들이 투표를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맞이할 때 그 전보다 더 큰 절망이 찾아온다는 것을 지난 대선은 보여줬다. 그래서 좌절한 청년들의 ‘탈조선’이 늘어날수록 대한민국은 점점 나이를 먹을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답은 분노밖에 없다. 미지근한 열정으로는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만이 우리에게 보여줬다. SEALDs의 노력에도 일본의 우경화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그저 뒤에서 지켜보기 때문이다. 샌더스가 결국 이길 수 없는 후보라는 현실 정치 논리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더 많은 미국 청년들의 분노가 결집돼야 한다. 한국 청년들이 절망의 키워드는, 부끄럽게도 결국 체념으로 이어져왔다. 순간의 결기로 반짝 타올랐지만, 곧 이내 그럼 그렇지란 말과 함께 사그라졌다. 국정 교과서 반대 시위에도 위안부 소녀상 철거 반대 시위에도 항상 청년들이 함께했지만, 고립된 채 외로운 싸움으로 이어져온 것이 태반이다. 부족한 것도 결국 분노였다. 화를 내기엔 너무 무기력한 사회지만, 그래서 체념할수록 남는 것은 더 큰 절망으로 답하는 사회였다.

 

한국은 화내지 않아도 쥐스탱 트뤼도와 같은 총리를 얻을 수 있는 캐나다가 아니다. “지금은 2015년이니까”란 대답으로 무지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아직까진 우리에게 없다. 슬프게도 한국에는 지금 한국의 수준에 적합한 정치 구조가 주어져있다. 이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 바쁘다면, 그 아무리 뜨거운 분노도 의미가 없다.

 

시위가 아니어도 좋고, 투표율 올리기 같은 가시적인 운동이 아니어도 좋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체념 대신 분노라는 사실만 잊히지 않았음 한다. 횃불이 아닌 촛불이래도 어둠보단 낫다. 가능성이 낮아도 버니 샌더스에게 해볼 만한 싸움이란 자신감을 주는 미국 청년들의 분노가 부러울 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by. 9

 

* 사진 출처 : 국민일보, SEALDs 누리집, 뉴스1(로이터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