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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회

<나의 투쟁> 재출간 : 배타성에 관한 소고

<나의 투쟁>이 독일에서 70여년 만에 재출간 되었다고 한다. 이를 다뤘던 국제면 기사를 보며 몇 달 사이 지나간 이름들을 떠올렸다. 막연한 기시감이 그저 착각으로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독일의 퀼른 집단 성폭력 문제는, 반 난민을 넘어 반 무슬림 정서를 심화시키는 추세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시리아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한 이후로 불거지고 있는 독일 내의 반감이 폭발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으로 추정되는) 아랍계 사람들에 의해 독일 국민들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직접적인 피해사실이 드러나자 정부에 의한 난민 수용 후 끓고 있던 독일의 불만 섞인 민심이 폭발했다. 메르켈 총리가 뒤늦게 나서서 강경대응을 지시하고는 있지만, 이를 덮으려 했었다는 뉴스 기사들 또한 계속해서 나오면서 분노는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핀란드, 스위스에서도 난민에 의한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는 등 문제는 비단 독일만의 문제를 넘어 점차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난민 자체를 거부한 유럽국가도 많아졌으며, 이는 더 나아가 프랑스의 극우당의 선전과 같은 유럽사회의 보수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의 모든 원인을 단순히 난민 문제만으로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에는 분명 무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를 따로 떨어진 현상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난민의 유입이라는 변수로 드러나게 된, 다문화에 대한 반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파괴력을 가질 징조를 보인다. 동유럽권의 스킨헤드에 대한 도시 괴담적 공포들 위로 유럽 국가 전역의 의혹과 분노가 덧붙여지면서 적개심은 점차 그 맨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슬림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감은, 난민이라는 변수를 만나자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중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근간으로 했다던 유럽사회 마저도 전혀 이질적인 변수들에 대한 배타성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향후 10년간, 아니 21세기 전반에 걸쳐 발생할 모든 사건사고들을 위시한 비극을 예고하는 서막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유럽과 달리 이러한 적대적 반감의 정서에서 자유로울까. 


몇 달 전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에게 쏟아졌던 온라인상의 비난을 기억하는가. 국회의사당에서 초콜릿을 먹으며 휴대폰 게임을 하는 그의 영상에 너나 할 것 없이 분노를 쏟아냈다. 그와 아울러 그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과의 협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사실과 이자스민 의원의 아들의 절도 사실까지 함께 도마에 올랐다. 그는 보수에서는 필리핀계 여성 이주민이라는 이유에서, 진보에서는 새누리당의 당적으로 국회의원이 된 비애국적 "보수 나팔수"라서 옹호 받지 못했다. 그는 이제 잘못과 무능력을 넘어서, 모두에 의해 한국인의 권익 대신 해외이주민에 대한 법률만을 제정하는 '가짜 국회의원'으로만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좌우가 통합된 '이상적'인 형태로.


전북 익산에 자리 잡을 예정인 할랄 푸드 산업 단지에 대한 비난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의 전형적인 치적 쌓기만을 위한 비경제적인 산업이라는 전망을 시작으로 할랄 푸드 생산을 위해 들어올 무슬림에 대한 불안,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유입될 이슬람에 의해 한국이 테러에 온상이 될 것이라는 걱정은 물론,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종교적 이유로 반대를 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이 또한 좌우 구별이 없다. 그리고 그 기저에도 역시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있다. 


우리 자신이 이자스민과 할랄 푸드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유럽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또한 수많은 이주민들에 의해 다문화가 진행되면서, 다른 맥락에서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필리핀 등 동남아 권에서 신부를 "수입"해 온 다문화가정이 자리를 잡고, 역시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외국노동자의 숫자 또한 무시 못 할 만큼 늘어나면서 다문화는 점차 현실이 됐다. 그러나 초창기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동정과 따뜻한 관심은 이제는 점차 적개심과 공포로 변해간다. 사기, 살인, 성범죄, 테러 등 모든 범죄에 외국인이 언급되기 시작하고, 다에시와 프랑스 테러 등으로 무슬림에 의한 피해가 보도될수록 이슬람에 대한 그 막연한 두려움은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단일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자부심과 맞물린 우리의 배타성은 이제 그러한 구별 짓기에 대한 최소한의 죄책감마저 떨쳐버리게 하는데 성공한 듯하다. 십년 전과만 우리 자신의 인식을 비교만 해봐도 이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지 않는가.


원인이 없는 배타성은 아니다.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던 것 또한 사실이고, 향후의 위험성마저 부정할 수 없다. 이주민에 대한 사회의 배타적 분위기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 흐름의 일부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향후 문제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없다면, 분명 심각한 형태의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은 항상 내포되어 있으며, 이는 시시각각 증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것이 모두 다문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자스민에 대한 분노, 할랄 푸드에 대한 거부감은 결국 퀼른 성폭력 사건에 대한 독일인들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합리적 이유도 있고, 감정적 요소도 섞여있지만 결국 타인에 대한 배타성이 그 근간이다. 이는 우리의 객관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합리적 대안 대신 감정적 대응을 야기한다. 비판이 아닌 비난이 되고, 해결 대신 배척하자는 주장이 주가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문화의 진행 자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는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 독일이 퀼른 사건을 이유로 모든 시리아 난민을 배척할 때, 향후 난민과 관련된 문제나 테러 문제가 완벽히 종식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자스민을 추방하고 할랄 푸드 산업을 무조건적으로만 거부한다면, 모든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비록 현상에 동의하지 않는다해도, 감정적인 대응이 사회적 정서란 이름하에 통용되는 것마저 옹호할 수 없다. 비판과 비난, 그 구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나의 투쟁>의 재출간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그저 기우로만 끝나기를 바란다. 그 독서의 목적이, 출판진의 의도대로 순수하게 비판을 위한 독서로만 종결되기를 바란다. 히틀러의 집권은, 경제적 위기로 인한 독일인들의 절망과 뿌리 깊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 없이는 불가능했다. 근거 없는 배타성은 - 그것이 테러가 되든 히틀러가 되든 - 비극으로 귀결될 뿐이다. 또다른 <나의 투쟁>이 도래하는 일만큼은,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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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