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부산국제영화제(BIFF) 여행기 3막

category 에세이/여행 2015.10.04 12:33

2박 3일의 부산국제영화제 여행이 끝났다. 마지막 여행기는 각자 써보기로 했다. 그만큼 할 말도 많을 테니까. 세 명의 이야기를 세 장으로 나눠봤다.  

3막 1장(by 락)

 

#1 숙소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건은 이미 꿈나라다. 벼와 함께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영화채널에서 <이웃사람>이 막 시작됐다. 3편의 영화를 보고 질릴 법도 한데 뭔가에 이끌리듯 4번째 영화를 보고 말았다. 배우 김성균의 섬뜩한 눈빛을 따라가다 보니 영화를 어느새 끝났다. 4시 반이다. 같이 보던 벼도 잠에 들었다.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인지,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인지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커피를 마시지 않았어도 잠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계 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애써 눈을 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내일 이후의 삶에 대해 잠시나마 그려보았다.

 

일어나 보니 여유가 없었다. 대충 씻고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하니 영화 시간 1시간 전이다. 결국 또 택시다. 원래는 무료 셔틀버스 타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택시 안에서 졸린 눈을 연신 비벼댔다. 이제 마지막 영화다.

 

#2 영화의 전당

 

시간이 남아 영화의 전당 근처를 배회하다가 레드카펫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 방송국 선배였다. 3년 만의 만남이었다. 우연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은 후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게 될 영화는 <카쉬미르의 소녀>였다. 별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대반전이었다. 발리우드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뜬금없는 춤과 노래는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다 못해 한참 바보 같아 보이는 남자 주인공과 티 없이 맑은 소녀의 여정이 뻔하면서도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

 

영화가 끝난 후 부산에서 권총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맘 편히 영화를 보던 극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와서 더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모였고, 국밥을 간단히 먹은 후 터미널로 향했다. 이제 부산과 헤어질 시간이다.

 

#3 버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몹시 피곤하기도 했고, 더 이상 나눌 이야기의 주제가 마땅치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마음이 깊어져갔다. 그동안 밀린 일들과 공부거리들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걱정만 하기는 싫었다. 부산에서 산 기념품과 잡다한 물건들을 보며 나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밤 8시가 다 되어서 서울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을 정취가 풍겼다. 부산에서 보던 달과 달리 서울에서 보는 달은 묘하게 달라 보였다. 이제는 현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부산에서 영화 볼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공상에 빠진 채 집으로 향했다. 

 

 

3막 2장 (by 건)

 

#1 영화의전당 중극장

 

벌써 마지막 영화다. 이틀 동안 나름대로 강행군을 했다. 총 4편의 영화를 내리 관람하면서 각자 영화 리뷰를 하기로 했다. 본 즉시 글을 쓰기로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여행기도 집에 돌아와 깔끔하게 씻고 쓰는 회고록이 되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백수면서도 바쁜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영화에만 몰입할 수 있는 시기가 있어서 행복했다. 마지막 영화는 그 행복에 보답하듯, 훈훈한 정서가 흐르는 영화, ‘라디오’였다. 삶과 죽음, 노년과 기억에 대해 90분 가까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라디오 소리가 이명이 되어버린 노인의 아름다운 추억이 참 보기 좋았다.

 

#2 동서울터미널로 달려오는 버스

 

생각보다 빨리 출발할 수 있었다. ‘라디오’라는 따뜻한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밖에서는  기 탈취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막상 내가 있던 위치가 사건 현장과 먼 곳이 아니었기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뉴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게 하는 일. 그리고 내 일이 아닌 일을 내 일처럼 느끼게 하는 힘. 은근히 걱정이 되어 핸드폰을 열심히 보느라 배터리가 다 떨어졌다. 다행히 범인은 잡혔지만 내 핸드폰은 죽었다. 버스에서 오롯이 생각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즐거웠지만 꽤 피곤했던 여행기는 일단 뒤로 하고, 내가 본 영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해봤다. 키워드는 두 가지다. ‘물’로 시작해서 ‘노인’으로 끝나는 끝말잇기다. 첫 영화 <비거 스플래시>는 제목 그대로 더 큰 물보라가 일어나는 이야기다. 물로 암시되는 닫힌 공간에서 욕망의 발현이 일어나는 묘한 아이러니다. 그리고 물은 다음 영화 <유스>로도 이어졌다. 노인 지휘자와 노인 영화감독의 우정을 중심으로 흐르는 영화 속에서 ‘물’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스위스의 휴양지에서 사람들은 자주 혼탕을 이용하고, 그곳에서 많은 일이 일어난다. 물이 중심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매개가 되는 것이 참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 <라디오>는 노인이라는 말을 받아 마무리한 영화다. 아버지가 물려준 유품인 오래된 라디오를 사랑한 노인의 이야기. 초반부터 노인의 아들은 라디오가 시끄럽고 전기세를 많이 나오게 한다며 부숴버린다. 그리고 노인은 라디오가 없는 삶을 받아들여간다. 시간이 흘러 노인의 귀에 라디오 소리가 이명으로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행복의 소리로 받아들인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던 작품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조금 정리하자 졸음이 밀려왔다. 개별적이고 더 자세한 리뷰는 뒤로 하고, 일단 잠에 들었다. 그리고 나의 꿈같았던 2박3일의 여행기도 여기서 끝.

 

#3 동서울터미널

 

잠에서 깨자 서울로 돌아왔다. 꺼져있던 핸드폰을 켜니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준비하고 있는 시험에 대한 이야기,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일정들. 다시 시작이다. 하지만 3일 전과는 조금 다르다. 적어도 여행에서 만난 영화들을 보며 느낀 것 하나.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 이 마음은 다시 나를 힘차게 걷게 만들었다.

 

 

3막 3장 (by 벼)

 

#1 영화의 전당

 

11시에 시작하는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월터 살레스, 2014)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10시에 영화가 시작하는 락의 시간에 맞춰 숙소를 일찍 떴다. 서둘렀던 덕인지, 시간계산을 잘못 했던 탓인지, 택시가 워낙 쏜살같이 달렸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뭐, 여유로워서 나쁠 건 없으니까.

 

숙소에서 미처 가지 못했던 화장실을 들르고, 무료 배포 잡지들을 하나하나 훑다보니 10시가 다 되어갔다. 락을 먼저 보낸 뒤, 건과 함께 미리 얘기해둔 대로 기념품점에 들렀다.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가 거칠게 그려진 파우치 하나를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로 골랐고, 아시아 영화와 프랑스 영화에 대한 책을 한 권씩 총 두 권 집었다. 물론, 책 두 권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요새 책 선물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카드 결제기가 먹통이라며 계산이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10시 30분 영화 시간에 맞춰 건이 먼저 떠났다. 오류는 카드결제기가 아니라, 일본인 기자가 건넨 신용카드에 있다는 걸 봉사자가 깨닫기 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드를 받아든 일본인 기자는 허무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다. 나는 속으론 분통을 터뜨렸으나, 최대한 티를 숨긴 채 웃으며 카드를 건넸다. 내 다음 차례로 계산대 앞에 선 백인 여자의 티 없는 미소도 위선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자는 전적으로 선해보였다.

 

#2 영화의 전당에서 CGV 가는 길

 

아무것도 안 먹기에는 영화 보다 힘이 빠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에는 어젯밤 대책 없이 먹어 제쳤던 음식들이 무거웠다. 편의점에서 계란 두 개와 커피를 하나 샀다. 명색이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백화점이나 편의점, 뭐 하나 제대로 매력적인 할인 상품이 없었다. 계란 두 개는 ‘원 플러스 원’이 아니라, 원래 두 개들이 제품이었다. 편의점 계란은 껍질이 쉽게 깨져 좋았다.

 

무료 잡지들, 책 두 권, 파우치가 담긴 봉지에 커피가 더해지니 새삼 무거웠다. 날은 더웠고 아직 영화 상영까지는 30분이 남았다. 무턱대고 영화의 전당 근처를 걷는데, 문득 기뻤다.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제각기 흩어졌다. 그 와중에는 나처럼 한가득 영화제 물건들을 챙기느라 바쁜 사람들도 있었다. 야외 벤치에 자유롭게 누워 있는 여자와 그 옆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읽고 있는 남자는 커플이어도 좋았고, 생판 모르는 관계라도 좋았다. 야외에 설치된 책 판매 부스에는 두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책을 파는 사람인지, 누가 책을 구경하려는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둘은 하나같이 표지를 들추고 있었다. 나는 마치 책을 파는 자원봉사자의 마음으로 책들을 살펴보았다. 팔리기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3 CGV

 

영화의 전당에서 CGV로 향하는 길목에서 내가 느꼈던 기쁨이란, 이를테면 암묵적 유대감에서 오는 거였다. 마치 영화제라는 거대한 결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영화 <트루먼 쇼>(피터 위어, 1998)의 거대한 스튜디오 속 연기자들처럼. 트루먼(짐 캐리)을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단 하나의 암묵적 메시지를 공유한다. ‘우리는 연기자다.’ 그들은 거대한 가상 마을 속에서 각자의 생활을 해나가지만, 그 모든 혼란통은 어디까지나 저 메시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트루먼 쇼의 스튜디오 안에서라면, 무엇이라도 좋은 것이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늙은 사람, 좀 못생긴 사람, 잘생긴 사람 할 것 없이. 그들은 거기 있기 위해서 바로 그곳에 있는 거니까. ‘연기자’로서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고, 그들의 모든 행위와 말은 연기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 마주치는 시선, 누군가의 시큼한 냄새, 유난히 더운 공기. 연기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야릇하면서도 흥분되는 그 모든 대상들. 거기서 오는 짜릿한 쾌감을 왜 난 이제 서야 느낀 걸까. 

 

횡단보도에서 마주치는 꼬마애와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잔소리를 내뱉는 아주머니도, 거나하게 취해 소리를 박박 질러대는 취객도, 깔깔깔 괴상한 몸짓으로 서로를 웃겨대는 일행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 어쩌면 나만의 착각일지라도, 2015년 10월 초라는 시간, 해운대 센텀시티라는 공간에 있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단 하나의 메시지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믿음을 말이다.

여유롭게 출발했으나, 막상 CGV에 도착하니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티켓을 보여주고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어둡고 좁은 통로는 잠깐, 탁 트인 공간에 벌써 사람이 가득 하다. 다들 어디서 온 걸까, 왜 이 영화를 보러 온 걸까, 나는 오늘 떠나는 데 이들은 언제까지 부산에 머무를까. 암전이 되고, 스크린이 환해진다. 옆 사람이 짧게 심호흡을 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