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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왜 그렇게 영화를 진지하게 봐?'에 답함

* 원래 <암살>에 대한 리뷰를 쓰려 했는데, 의도치 않게 서문이 길어지고 따른 얘기가 되어버려서 따로 옮깁니다.

 

‘천만’ 영화가 판치는 세상이라 그런가. 돈 좀 들인 영화의 개봉이 가까워질수록 호들갑은 사방에서 한층 부풀어 오른다. “손익분기점이 얼마야?” “오백 만은 넘어야 뭐라도 좀 남을 거 같은데, 글쎄...” 심지어 경영계에서나 쓰였던 전문용어 ‘비피BP(손익분기점)’가 영화를 얘기하는 와중에 종종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영화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토마스 인스로 대표되는 헐리우드 영화) 산업화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영화가 그저 자동차나 냉장고, 전자레인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자동차 시동을 켜며 눈물을 훔치거나, 냉장고 문을 닫으며 벅차하거나, 전자레인지를 작동시키면서 설레는 사람은 없다.

 

종종 영화에 대한 나의 관점을 말하거나, 쓸 때마다 ‘도대체 영화가 뭐라도 돼? 그냥 즐기면 그만이지.’라는 뉘앙스의 반응이 왕왕 뒤따른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가 ‘그냥 즐기는 대상’에 그쳐선 안 된다고 믿는다. 그냥 즐긴다는 것은 ‘소비’와 같기 때문이다. ‘소비’란 말 그대로 써서 없앤다는 것이다. 없애려면 남는 게 있어야 하므로, 소비 이전에 과잉이 있어야 한다.

 

좀 더 나가보자. 자본주의에서 과잉은 무엇인가. ‘재고stock’다. 재고는 한 마디로 팔리지 못한 상품이다. 순환하지(돈으로 바뀌지) 않는 상품, 즉 재고란 빨리 없애야 할 대상이다. 자동차들이 팔리지 않아 창고에 가득 쌓인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앞에 선 자동차 사장의 불안을 떠올려보라.

 

그러니까 영화가 그저 소비되는 ‘상품’과 다르다는 것은, 달라야 한다는 것은 영화는 곧 과잉의 매체여야 한다는 말과 같다. 영화는 무언가가 넘쳐나는 지점, 잉여의 순간을 지시해야 한다. 곧, 영화는 어찌됐건 예술로 남아야 한다. 어떤 과잉의 감정(문학/회화), 몸짓(춤), 소리(음악) 등을 표현해내는 것 자체가 예술이니까. 이를 두고 꼰대니, 답답하니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자동차와 영화의 차이를 인지하는 모든 이들이 어느 정도 예술로서의 영화를 인정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이 <인사이드 아웃>을 보며 흘렸던 눈물, 그 슬픔의 감정을 빨리 소비하지(눈물을 훔치고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불안에 떨지 않았다면 말이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