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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 텀 12>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

category 영화/주말이다 영화야 2015.07.01 08:00

영화 홍보가 부족한 탓인지, ‘힐링’이라는 표현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유행이 지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 이유야 어쨌건, 다행히도 <숏 텀 12>을 다룬 글들에는 ‘힐링 영화’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힐링’이란 무엇인가. ‘힐링’은 치유와 다르다. 물론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healing’은 ‘치유’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지금 단순히 사전적 의미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지난 몇 년 동안 사회 문화적인 형성물로서 ‘힐링’, 그러니까 우리가 추상적으로 어렴풋하게 떠올리는 개념이 아니라 그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직접 느끼고 경험해온 대상으로서 ‘힐링’이다.  

 

이런 관점에서 ‘힐링’의 주요 특징을 두 개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우선 힐러, 즉 치유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곧, 힐링을 하는 존재와 힐링을 받는 존재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말이다. TV에서 ‘힐링’이라는 수식어를 단 강연 프로그램들, 혹은 천편일률적인 힐링 서적들만 봐도 그렇다. 강연자, 혹은 저자는 일방적으로 ‘힐링’을 전파한다. 반대로 시청자 혹은 독자는 일방적으로 ‘힐링’을 받아들인다.

 

또한, ‘힐링’은 언어로 이뤄진다. ‘달변가’아닌 강연자들을 본 기억은 없으며, 언어만으로 구성된 책이야 말할 것도 없다. 가끔 그림을 끌어 들여온 ‘힐링’책들도 있긴 했지만, 거기서 그림은 도대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 옆에 섣불리 달린 해설로서 언어들은 그림을 ‘힐링’의 수단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림은 언어 옆에서 초라하다. 말하자면 그들이 내세운 그림이란 그저 삽화정도의 역할만 할 뿐이다.

 

<숏 텀 12>에는 분명 여러 인물들의 갈등과 그 속에 도사리는 상처, 그리고 치유가 형상화되어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숏 텀 12>를 ‘힐링’ 영화로 칭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힐링’이라는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이 아니라, 영화에서 형상화되는 치유가 위에서 말한 ‘힐링’의 특성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1. 치유는 일방적이지 않다. 

 

‘숏 텀 12’란 문제 청소년들을 12개월 동안 위탁하는 시설의 이름이다. 영화는 그곳에 네이트(레미 말렉 분)가 (짐작건대) 봉사활동 차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영화는 비슷한 유형의 영화에서 보통 전개되는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숏 텀 12’ 속 아이들과 보호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난폭하거나 강박적인 행동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간간히 그러한 현상 아래에 딱지진 생채기들을 암시한다.

 

여기서 한 번 ‘힐링’의 잣대를 들이대 보자. 과거의 상처로 인해 문제아가 되어버린 아이들. 그들에겐 상처를 치유해주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 힐러가 필요하다. 영화 초반에서 분명 힐러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호사 즉, 그레이스(브리 라스 분), 메이슨(존 갤러거 주니어 분), 제시카(스테파니 베아트리즈 분)와 네이트다. 초짜 신입 네이트에게 그레이스들은 별 거 아닌 듯 자신들의 일과를 설명한다. 설명 도중 갑작스레 탈출을 시도하는 새미(알렉스 캘러웨이 분)를 따라잡아 진정시키는 모습에서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진다. 다음 씬, ‘숏 텀 12’ 건물 안에서 그레이스들은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아이들을 지휘하는가. 나름 엄격해 보이는 규율을 마커스(키스 스탠필드 분)에게 상기키는 씬도 그렇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 그네들은 분명 힐러다.

 

하지만 이후 영화의 전개는 전혀 달라진다. 더 이상 그레이스들은 일방적으로 상처를 들어주고 치유해주는 힐러가 아니다. 계속해서 영화는 특히, 그레이스의 상처를 부각시킨다. 그레이스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살피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큰 상처가 몸 깊숙이 새겨진 존재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뒤로한 채 아이들에게 다가가지만, 그런 식의 일방적인 ‘힐링’은 쉽지 않다. 거기다 증오했던 아버지의 출소가 다가오자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도 어려워진다.

 

결국 그레이스는 결코 힐러가 아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힐링’도 불가능하다. 그 대신 영화는 '힐링'과는 다른 치유의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그레이스와 제이든(케이틀린 데버 분) 사이에서. 둘의 상처에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공통적으로 자리한다. 그들에게 트라우마는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얘기조차 쉽게 꺼내지 못하며, 어렵사리 꺼낸다 해도 왜곡되기 일쑤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레이스의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애인 메이스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제이든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마찬가지로 제이든은 그레이스에게서 자신의 과거, 혹은 미래를 본다. 그 어떤 타자도 믿을 수 없었던 둘은 자기와 꼭 닮은 타자를 만나게 된다. 둘 사이의 치유 혹은 개선은 어느 한 쪽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보듬어주거나 눈물을 닦아주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에는 그 흔한 위로 혹은 격려의 전언조차 오고가지 않는다.

 

2. 치유는 언어가 아니다. 

 

어디서든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제이든과 그레이스에게 언어란 무용지물이다. 그들에게 말이란 그야말로 억압이자 금기의 대리물이다. 아버지의 출소 소식을 들은 뒤 그레이스는 사시나무 떠는 듯 불안해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여기서 언어는, 보다 일반화하면 의미(있는 행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후 위탁소장쯤 되는 잭(프란츠 터너 분)을 항의 차 찾아간 그레이스는 분노를 좀처럼 억누르지 못한다. 마치 위탁소의 아이들이 오버랩되는 것 같은 이 행위는 억압된 욕망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폭발한 결과다. 이후 그녀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제이든을 찾아간다. 그녀의 살기(殺氣)는 자기 아버지가 아닌, 제이든의 아버지로 옮겨간다. 말하자면 금기된 욕망 앞에서 그레이스는 제이든의 아버지를 (최소한 상징적으로) 죽임으로써 욕망을 대리 충족하려 한다. 하지만 제이든에게 발각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압권은 바로 그 다음 씬이다. 결국 그레이스와 제이든은 그 누구의 아버지도 살해하지 못하지만, 둘은 동시에 제이든 아버지의 자동차를 ‘작살’낸다. 여기서 살해의 대상이 자동차로 (다시 한 번) 옮겨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명의 아버지와 두 명의 딸. 두 딸의 불가능한 욕망은 바로 위의 아버지를 향하지 못하고 대신, 교차하여 상대의 아버지를 향한다. 기본적인 네 인물의 관계는 아래 왼쪽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안정적인 순환을 이룬다.

 

그런데 이때 제이든의 집에서 둘이 만난 이후 안정적이던 순환은 기묘해진다. 이를테면 그건 오른쪽 그림처럼 끊임없이 어긋나며, 갈 곳을 잃은 욕망이 흩뿌려지는 광포한 순환이다. 비유컨대, 비행기에서 창문이 열린 순간이다. 이 끔찍하고 지리멸렬한 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건 자기의 아버지는 물론 아니며, 대리-아버지로서 상대방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건 아버지 일반을 넘어서는, 아버지가 아니면서 아버지를 지칭하는 어떤 상징물, 즉 자동차다. 자동차 박살 씬이 그토록 통쾌하고 짜릿했던 까닭 중 하나다.

 

유리 깨지는 소리만이 무성했던 위 자동차 박살 씬 뿐만 아니라, 제이든의 이어폰 한 쪽을 귀에 꽂고 드럼 치는 흉내를 내는 씬이나, 역시 메이슨과 마커스가 합동 공연(?)을 하는 씬, 거기다 위탁소를 벗어난 제이든과 그레이스의 아기자기한 쇼트들에서도 언어는 부재한다. 이렇게 <숏 텀 12>에서 제시하는 치유의 순간이란 언어가 아닌, 침묵 그 자체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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