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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도쿄 트라이브>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

화끈하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움! 자극적이다. 통쾌하다. 섹시하다! 여기까지가 <도쿄 트라이브>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감상평들이다. <도쿄 트라이브>는 인상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영화에서 시각, 청각을 자극하는 ‘인상’이란 가장 기본적인 층위이긴 하더라도, 반대로 1차적인 감상에 불과하다. 거기서 그친다면, 해당 영화에 대해 웰메이드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도쿄 트라이브>에 이 같은 잣대를 들이대기란 간단치 않은 문제다. 이건 소노 시온이라는 이름, 더 나아가 B급 영화라는 장르의 개성이자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도쿄 트라이브>에 대한 실망감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이전에, 짧지 않은 변명부터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1. B급 영화

 

B급 영화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저급’ 영화를 가리킨다. 대공황기 미국 영화 산업계는 불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값싼 영화들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싸구려지만, 같은 값에 여려 편을 볼 수 있는 값싼 영화들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B급 영화는 이렇게 다분히 경제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탄생했다. 질보단 양. 소비되기 위해, 이윤 추구를 위해 생산되는 영화들. 한동안 B급 영화는 ‘저급’, ‘키치’, ‘대중문화’ 등 열등한 장르로 분류됐다.    

 

하지만 오늘날 B급 영화란 고급/저급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며, 위계적인 구분과는 상관없다. 특히 프랑스 비평가들의 적극적인 재조명 이후, B급 영화는 고급 영화, 소위 A급 영화들의 형식적이고 장르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장르로 여겨졌다. A급 영화에서 금기시 되는 내용, 형식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B급 영화들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영화의 무의식을 내세우는 셈이다. 철학 전반에 있어 프로이트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그랬듯, B급 영화는 영화계에 있어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변해왔다. 이렇게 단지 뉘앙스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B급 영화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로 급변했다.  

 

B급 영화들은 컬트적이나 매니악한 경우가 대다수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것을 넘어서, 애초에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소수인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통념을 거부, 혹은 외면하기 때문이다. 상식을 벗어나는 것, 암묵적인 합의를 깨부수는 것이 B급 영화 특유의 에너지의 자양분인 것이다.

 

여기까진 B급 영화에 대한 일반론이었고,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말했듯이 B급 영화는 B급을, 상식적인 기준의 파괴를 지향한다. 거기까진 좋은데 문제는 이게 일종의 만능열쇠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데 있다. ‘B급’이라는 강력한 방패 앞에서 모든 비판들은 튕겨나간다. 애초에 영화는 해선 안 되는 것들만 골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68혁명의 전복적인 기치 앞에서 ‘평가질’이 무슨 소용이랴. B급 영화에서 드러나는 모든 한계는 또 다른 가능성이며, 모든 문제점은 의도된 탈선이다. 이는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는 구석이다. B급 영화는 늘 자기의 변명을 영화 속이 아니라, 장르라는 높은 층위에서 (이미) 마련해놓기 때문이다.  

 

2. 도쿄 트라이브 – 과잉의 미학?

 

그렇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어려움 와중에도 이제부터 <도쿄 트라이브>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해보려 한다. 짧지 않은 위 이야기들은 사실상 변명이었다는 건 이런 의미에서이다. 비록 나의 비판이 칼로 물 베기라고 할지라도. 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도쿄 드라이브>가 아니라 소노 시온, 더 나아가 B급 영화라는 장르일지라도. 절대적인 가치 하에 옳고 그름을 나누는 문화적인 권력도 잘못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고 튕겨내는 상대주의도 건강하지 못한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몇 컵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슴, 메라(스즈키 료헤이 분)의 근육질 구릿빛 몸매, 디제잉하는 할머니, 굳이 치마를 입은 상태로, 하이킥을 날릴 때마다 노출되는 순미(세이노 나나)의 속옷과, 굳이 클로즈업하여 머무는 카메라. 영화는 이처럼 특히 섹슈얼한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등장시킨다. 이러한 변태적인 감성에 더하여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미지까지. 말하자면 <도쿄 트라이브>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난삽하고 화려한 영화 포스터 한 장이 영화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배틀-랩 뮤지컬’이라는 홍보 문구에 맞게 영화는 강렬한 비트와 랩으로 일관했다. 랩 아닌 대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간헐적으로 비트가 멎는 순간에는 고요가 낯설었다.

 

초반에 말했던 1차적인 인상으로서 이미지들과 음악은 이렇게 강렬했다. 이런 방식으로 구성된 영화는 난생 처음이었고, 실험적 시도는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화는 자극 혹은 새로움만을 위한 매체가 아니다. 늘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영화여야만 하는 이유를 마련하고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즉 영화가 여타 장르, 예컨대 소설이나 드라마, 광고, 뮤지컬 심지어 포르노그라피와 결정적인 변별점을 갖지 못한다면. 영화의 존재근거는 사라진다. 그 모든 것들의 짬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쿄 트라이브>는 한 마디로 과잉된 짬뽕 영화다. 다양한 장르(원작은 만화다), 문화, 예술 등을 한데 어울렀다. 그 와중에 영화는 네러티브를 마치 피할 수 없는 장애물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두서없었고, 인과나 개연성따위는 없었다. 인물들의 개성은 하나하나 강렬했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이미지에 가려 붕 떠 있었다. 한 명 정도 빠진다고 해서 영화에 지장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요소들에 ‘과잉의 미학’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잉에 대한 함몰이기도 한 것이다. 

 

첫 꼭지의 변명에서 밝혔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다. B급 영화의 무지막지한 블랙홀 앞에서 이런 견해들도 간단히 부정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비판적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진 않는다. 어쨌든 가만히 고여있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이는 것이 건강한 거니까.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