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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이슬람을 이슬람의 언어로 상대하다

올해 1월 프랑스에서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괴한 3명으로부터 공격당했다. 피습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괴한 3명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알려지면서 프랑스 곳곳에서는 이들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라는 슬로건 아래 파리 광장에 결집했다.

지젝이 보기엔 이 장면이 아주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프랑스 경찰은 시민들에게 조롱과 욕설의 대상이었다. 테러 이후 프랑스 경찰과 시민은 공동의 적(이슬람)을 두고 하나 된 모습을 보였는데, 지젝은 이를 위선과 허상에 가까운 현상이라 단언한다. 대신 그는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하게 정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유지시키는 근간을 공격하는 행위다”라고 전제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프랑스의 시위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까?” (13쪽)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

 

그는 먼저 테러의 원인을 짚고 넘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만화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지젝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정한 근본주의자에게는 시기도 원한도 없다. 그들은 불신자가 사는 방식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테러를 일으킨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진정한 근본주의자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끼겠는가!”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그들을 열등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이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열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젝의 지적은 급진적이다. 기존 서구사회(강자)와 이슬람(약자)의 대립 관계를 해체하고, 갈등의 원인을 이슬람 내부의 모순에서 찾는다. 그동안 이슬람 문제는 기껏해야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문제라고 치부된 것이 사실이다. 지젝은 문제를 에두르기보다는 직시하는 방법을 택한다.

서로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그렇다면 자유주의가 최선인가? 지젝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자유주의는 근본주의자의 맹습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다. 이것은 역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유주의 내에는 결함이 있고, 이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근본주의라고 지적한다. 언뜻 보면 대립하는 관계이지만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서로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유주의적 방임과 근본주의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을 포착한다. “자유지상주의자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모든 권위를 비웃고 풍자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타인이 겪는 고통과 모욕에 대한 과민한 반응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이 같은 문제는 관용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반대의 상황을 가져와 설명한다.

 

지젝은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에서 동성애자들이 공격당한 사건과 프랑스에서 여성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한 것을 그 예로 든다. 즉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신성 모독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부르카 착용은 도저히 가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의 눈에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억압적인 금지다. 개인의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슬람 여성이 종교적 제약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자신이 원해서 부르카를 착용하고 있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서구사회의 반발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혹은 종교적 제약이 아닌 종교적 신앙이 강해서일지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의 금지 조치는 이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저 이슬람 여성이 종교적으로 억압받고 있기에 부르카를 착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적으로 전제한다. 이처럼 폭력에 가까운 금지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폭력과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방향은 거의 같다.

이슬람 경전을 무기로 든 지젝

 

2장에서 지젝은 이슬람 경전을 무기로 이슬람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고아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지젝은 “이슬람교의 신은 아버지 기능이 중지되고 후퇴하며 실패하고 ‘상실’되었을 때에 개입한다”고 전제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교는 가부장적 계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문에 이슬람의 공동체는 평등주의를 지향할 수 있다. 지젝은 이것이야말로 이슬람교의 ‘가장 좋은 장점’이라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은 점은 가장 나쁜 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처럼 마을에 교회를 세우지 않는다. 즉 제도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국가권력은 이슬람교를 이용하기가 쉽다는 것이 지젝의 해석이다. 즉 국가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제도화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는 곧 국가적인 문제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별 것도 아닌 종교 문제가 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은 바로 이슬람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결합 때문이다.

 

지젝은 코란을 인용해 이슬람교에 실제로 희생에 반대하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무함마드와 최초의 신자이자 첫 번째 부인인 하디자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만이 진리를 보증할 수 있음을 증명해낸다. 실제로 코란에서 하디자는 신의 모습을 직접 본다. 이는 무함마드도 체험하지 못한 경험이다.

 

결국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베일로 가리는 것은 그만큼 여성에 대한 환상과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지젝은 베일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가리는 목적으로 베일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이슬람이 여성을 배척하고 억압하지만 그 방식으로 인해 오히려 여성 주체성이 품은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고 강조하며 책을 마친다.

 

지젝의 지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채 1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의 얇은 책이지만 사유의 정도가 깊어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오히려 옮긴이 배성민의 말이었다. 그는 “이슬람교와 상대하려면 알라와 무함마드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며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지젝은 제대로 간파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젝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좌파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옮긴이의 비판이다. 지젝의 주장은 유럽인에게는 급진적일 수 있어도, 정작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 경전을 정신분석학적(서구의 방식)으로 분석한 것에 동의할 이슬람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 그들이 이슬람의 무신론적 요소를 깨닫는다 해도 그들에게 이후 벌어질 일은 내분과 분열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지젝의 접근 방식 자체에는 의의가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좌파는 좌파의 언어대로, 우파는 우파의 언어대로 서로를 공격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멸렬한 논쟁이 해결의 기미도 없이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책은 표면적으로는 이슬람과 서구 사회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진 출처: 글항아리, 한국철학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