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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써드 퍼슨>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

<써드 퍼슨>은 파리, 로마, 뉴욕에서 각각 벌어지는 세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세 곳에서 벌어지는 세 이야기는 마냥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이야기들은 기묘하게 서로 연결되어있다. 

이를테면, 파리에서 마이클(리암 니스 분)과 안나(올리비아 와일드) 묵는 호텔과 뉴욕에서 줄리아(밀라 쿠니스 분)가 근무하는 호텔은 마치 하나의 공간인양 이어진다. 또한, 줄리아의 뉴욕과 스콧(애드리언 브로디 분)과 모니카(모란 아티아스 분)의 로마 사이는 비슷하지만 다른 풍의 멜로디로 이어진다.

 

하자면 영화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다. 별 다른 사건 없이 영화가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끊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까닭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미세한 수수께끼를 던진다.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지점들을 마구잡이로 연결한다. 자연스레 관객은 겉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을 설명해내고자 골몰한다. 즉, <써드 퍼슨>은 일종의 추리물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써드 퍼슨>을 마냥 추리물이라는 형식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여기서 <써드 퍼슨>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1. 내용 – 작가 폴 해기스의 성취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은 폴 해기스는 전화 한 통 만으로 스타들을 섭외할 수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영화계에선 저명한 인물이다. 감독으로서 데뷔작인 <크래쉬>(2004)는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을 휩쓸기도 했다. <써드 퍼슨>은 그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러 면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특히, 역시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서사의 구조는 치밀했고, 대사나 메시지는 정갈했으며, 다양한 상징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세 가지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방식은 단연 돋보였다. 단지 병렬적이지 않고, 서로 긴밀한 연관이 있는 이야기들이 영화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놓아졌다. 음악, 컷, 의상, 색깔 등을 활용해서 세 이야기들의 오묘한 위치를 적절하게 묘사했다.

 

또한, 영화가 궁극적으로 던진 메시지 또한 심오했다. ‘써드 퍼슨’, 번역하면 ‘제3자’라는 영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폴 해기스는 <써드 퍼슨>을 통해, 엄밀히는 그가 구상한 마이클이라는 제3자를 통해 자신에 대한 질문은 던졌다. 구체적으로, 그는 마이클을 내세워 궁극적으로 작가라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언급할 순 없으나, 폴 해기스는 ‘작가란 무엇인가?’하는 추상적인 질문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구체화시켰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의아스러웠던 부분들은 결말 이후, 하나하나 메시지가 되었다. 그야말로 파울 클레가 그랬듯,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라할 만하다. 작가 폴 해기스의 천재성이 빛난 지점이다.     

 

2. 형식 – 감독 폴 해기스의 기만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소제목이 암시하듯, 아쉬움이란 형식에 대한 얘기다. 위에서 언급했듯, <써드 퍼슨>은 일종의 추리물의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흥미와 긴장은 솔직히 전적으로 그러한 형식에 기인한다. 바로 위에서 짚었던 내용에서의 성취는 흥미롭다기보다는 생각할 거리와 토론거리를 던져주었을 뿐이다. 시종일관 긴장을 놓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수수께끼와 단서를 제시하는 영화의 구성 때문이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기묘한 단서들을 짜 맞추고자 애쓰면서 영화를 봤다. 절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추리의 결과가 나오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영화의 결말, 즉 감독의 ‘해제’를 본 순간 내가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분노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영화는 관객을 기만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던 이는 물론이겠지만, 본 이들도 내가 왜 ‘기만’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만’이란 암묵적인 약속, 혹은 전제에 대한 파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방 세 개로 이뤄진 집 ‘밖’에 각 방의 전구와 연결된 스위치가 세 개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단 하나의 스위치만 눌러 그게 어느 방 스위치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소위 ‘빌게이츠 문제’로 유명한 문제다.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해답이 안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빌 게이츠가 등장한다. 그리고 만약 다음과 같은 답을 말해준다고 하자. “바보야. 친구 불러서 방에 들어가 보라고 하면 되지.”

 

이걸 진정 해답이라고 생각하며 ‘역시 빌게이츠는 천재야.’라며 감탄하는 이가 있을까? 물론 그의 말이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답은 애초에 제시된 문제의 논리에서 벗어난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제약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경우다. 문제에서 ‘친구를 부르면 안 된다’라고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논리적으로 그러한 방법은 고려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문제 푸는 이에 대한 출제자의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논리적인 것 마냥 제시해서 놓고, 비논리적인 해답을 주는 셈이니까.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내게 <써드 퍼슨>은 기만이었다. 엄밀히는, <써드 퍼슨>이 취한 추리물이라는 형식은 나를 속였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주어진 단서들을 이리저리 굴려봤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세 가지 다른 이야기가 기묘하게 연결되는 비논리적인 지점들을 논리적으로 이어보려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영화가 내놓은 대답이란! 영화는 해답으로서 논리를 벗어나는, 일종의 만능열쇠를 제시했다. 물론 위의 대답이 그랬듯 그게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정답은 논리적 문맥 밖에 외따로 있었다. 동시에 나의 노력이 헛수고였음이 드러났다. 나는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애를 쓴 셈이었다. 암묵적인 약속이 간단히 깨져버렸다. 폴 해리스가 팔짱끼고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했어, 멍청아.”라며.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