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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모스트 바이어런트> 바보야, 문제는 year이야

<초 [민망한] 능력자들>(그랜트 헤스로브, 2009)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는가.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정확히 세 번 놀랐다. 우선, 가벼운 단순 코미디 정도로 예상했던 기대와는 달리 영화는 꽤나 무거웠고 나름대로 현실에 대한 유비로 충만해 있었다. 두 번째로 놀란 건 원제를 보고난 다음이었다. The Men Who Stare At Goats. 번역하면 ‘염소를 응시하는 남자들’ 정도가 되겠다. 원제와 한국어판 제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한국어판 제목과 달리, 원제는 영화의 내용에 충실했다는 데 있었다. 그야말로 ‘강남의 귤이 강북에서는 탱자가 된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지 싶다.

굳이 번역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다. 원제의 발음을 그대로 따서 한국어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원제와 번역된 제목 사이가,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영화와 번역된 제목 사이가 멀어서는 곤란하다. 한국에서는 레옹의 계보를 잇는 듯한 제목, <와사비 : 레옹 파트2>(제라르 크라브지크, 2001)로 소개되어 수많은 비난과 욕설로 점철된 영화의 원제는 그저 Wasabi였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소피아 코폴라, 2004)라는 다소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영화의 원제는 놀랍게도 Lost In Translation이었다.

 

여기서 소개하려고 하는 <모스트 바이어런트>의 원제는 A Most Violent Year이다. ‘year’만이 빠졌을 뿐이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드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앞서 제시한 예들에 비해서는 훨씬 낫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year’이기 때문이다. ‘most violent’가 형용하는 대상이 없는 상황에서, 그 대상을 사람으로 추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괄호쳐져있으리라 예상했던 (man/woman)을 좇으며 영화를 봤다. 하지만 원제에서는 명확히 언급되었던 반면에, 번역된 제목에서 빼먹었던 명사는 ‘man’이나 ‘woman’이 아니라‘year’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오해하고 봤던 셈이다. <모스트 바이어런트>에서 나름 강렬한 존재를 과시하는 인물들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1981년의 뉴욕’이라는 태풍의 눈 주위에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 혹은 방식을 중심으로 아벨을 살펴보자.

 

영화에서 계속 묘사하듯, 아벨은 아메리카 드림의 표상이다. 그는 라틴계 이주민이지만, 갱단 보스의 딸과 결혼하여 나름 번듯한 석유 회사를 운영한다. 하지만 그의 신조는 뚜렷하다.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그에게는 사업을 번창하려는 욕구만큼 그러한 신념도 크다. 사슴에게 쏜 총 소리에도 소스라치듯 놀라는 그는 양 극단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사업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아벨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상황은 악화된다. 완고하게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신념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동시에 사업도 악화일로에 치닫는다. 말하자면 두 욕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아벨은 그 어떠한 욕망도 추구하지 못할 위험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념과 사업 모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결국 아벨은 갱스터의 길을 ‘택’하게 된다. 즉, 신념을 버리고(무슨 수단이든 다 동원하여) 사업의 번창에 올인한다. 그런데 과연 아벨이 갱스터로서의 길을 ‘택’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결정을 내린 것은 아벨이지만, 그 선택에 개입된 수많은 역학들을 무시할 순 없다. 오히려, 위에서 비유했듯 아벨은 그 역학들에 휩쓸렸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분명 자신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비유를 좀 더 밀고 나가보자. 갱스터의 길을 택하기 전까지 그는 강력한 소용돌이의 힘에 저항하고자 아등바등했지만, 결국은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만다. 그런데 중요한 건, 저항을 위해 꽉 쥐고 있던 손을 푼 행위가 마침내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사업가 개인이기 이전에, ‘가장 폭력적인’ 1981년을 살아가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메리카 드림? 웃기지 말자. 그의 성공은 그저 갱단 보스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업이 잘 안 풀리고 신념마저 흔들리는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이는 아벨을 갱스터로 전환시킨 가장 큰 계기였다. 하지만 뒤에 드러나듯 그런 고난의 원인이 일방적으로 외부에 있던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벨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검사 로렌스(데이벗 오예로워 분)나 수많은 석유 사업 경쟁자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시에 그건 가장 가까운 관계, 즉 안나(제시카 차스테인 분)나 앤드류(앨버트 브룩스)에 의해 ‘공모’되었다.

 

다음 장면을 기억해보자. 불시에 로렌스는 아벨의 집을 압수수색한다. 아직까지 회사가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순진한 아벨은 안나의 요구에 따라 서류들을 숨겨놓는다. “무고한 내에게 왜 이런 시련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아벨이 무기력하게 있을 때 안나가 로렌스를 직접 상대한다. 갱단 보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는 강하게 로렌스를 협박한다. 차에 걸터 있는 둘을 잡은 쇼트에서 둘은 날선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다가 서류 위에 주저앉아 있는 아벨의 쇼트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전 쇼트에서 나누던 안나와 로렌스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즉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아벨의 모습 위로 모든 사실을 알고 있고, 무엇보다 1981년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던 둘의 대화가 흐른다.  
 

비유컨대 그는 미로 속에 놓인 한 마리의 생쥐였다. 그는 스스로 길을 찾아 갔지만, 애초에 출구는 정해져 있었다. 눈앞에 맞닥뜨린 벽은 늘 그를 좌절시켰다. 벽이란 로렌스의 존재나 석유 운송 차량 절도사건이었다. 안나와 앤드류는 언제나 그의 옆을 지키며 그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척’했지만, 뒤에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그들은 미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1981년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해가 (자신들을 포함하여) 얼마나 강력하게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를 알았으니까.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