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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다큐멘터리의 존재방식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연출을 맡은 사라 폴리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그녀의 가족, 특히 어머니에 관해 얘기하지만 그건 사실상 폴리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영화 내내 폴리는 가족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좇는다. 그 과정에서 폴리의 이야기가 은연중에, 혹은 직접 드러난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단지 가족, 어머니를 경유해 궁극적으로 폴리를 향하는 것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건 그녀가 활용한 영화라는 형식이며,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배치한 과잉적인 요소들이다. 그런 것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폴리는 기록으로서 영화(엄밀히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얘기한다.

 

과잉적 요소의 배치 – 인터뷰와 이야기의 어긋남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우선, 녹음 스튜디오 씬이 있다. 거기서 폴리의 아버지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내레이션을 녹음한다. 그는 녹음실에 서서 예전에 폴리에게 보냈던 장문의 편지를 읽는다. 또한, 폴리가 자신의 삶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씬이 있다. 여러 사람의 인터뷰가 번갈아 등장하지만, 각 인물에 대한 인터뷰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인터뷰이interviewee를 잡는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과거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다. 이 부분은 내레이션 씬, 혹인 인터뷰 씬 와중에 끊임없이 소환된다.

 

마지막 부분, 즉 어머니의 과거를 담은 영상들은 인터뷰 혹은 내레이션의 내용에 꼭 들어맞는다. 말하자면, 여러 인터뷰이들의 증언은 과거 영상들을 통해 보증된다. 그네들은 종종 불확실한 표정을 지으며 기억을 더듬는다. 가끔 인터뷰어interviewer, 즉 폴리에게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보충을 요구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는 여러 개의 불완전한 기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과거 영상의 역할이다. ‘팩트’로서 그 영상들은 어렴풋한 기억을 선명한 이미지로 완성한다. 그러므로, 더듬거리며 재구성한 이야기들은 곳곳에 삽입된 영상을 통해 일정 정도 ‘팩트’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과잉적 요소가 배치된다. 즉, 영화는 ‘팩트’인줄만 알았던 과거 영상이 사실상 폴리가 연출한 영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 영상을 찍고 있는 카메라 뒤에 폴리가 서 있던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등의 진짜 과거인 줄만 알았던 영상이 폴리가 만들어낸 허구임이 밝혀진다. (아버지 마이클 폴리는 피터 에반스가 연기했고, 어머니 다이앤 폴리는 레베카 젠킨스가 연기했다.) 이러한 과잉을 통해 영화는 완전히 재구축된다. 과거(과거 영상)->현재(인터뷰)의 순서는 현재(인터뷰)->과거(인터뷰에 기반을 둔 영상)으로 역행하며, 과거 영상은 근거로서의 지위를 인터뷰에 내어준다. 이제는 반대로, 인터뷰가 과거 영상을 보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팩트는 불완전한 기억들로 재구성한 것일 따름인 허구로 전락한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행위와 이야기(기억) 그 자체는 서로 어긋나면서 맞물린다. 말하자면 둘은 다른 차원, 다른 시점에서 서로를 향한다. 기억은 말하는 행위를 향하는(뒷받침하는) 듯하지만, 사실 기억은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은 말하는 행위를 향‘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두 가지 시점의 구분이 불가피해진다. 도식적으로 나타내면 ‘기억(근거)->말하는 행위(진술)’, 이후 ‘말하는 행위(근거)->기억(진술)’. 전자의 근거는 후자의 진술이 되고, 전자의 진술이 후자의 근거가 된다. 같은 시점이라면, 둘은 하나의 완전한 논리적 전체다. 하지만, 둘은 결코 같은 시점에 위치하지 않는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부정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분리된 시점에서, 둘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할 뿐이다. 결국, 기억과 말하는 행위는 불가능한 방식으로(즉,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서야) 서로의 존재를 보증하고 있는 셈이다.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 시선의 비대칭

 

이제 위의 논의를 토대로, 영화 자체에 대해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전에 잠시 사진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서 느끼는 감정적 울림을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간단히 말해, 전자는 관습적인 해석의 틀을 통해 사진을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스토리 텔링의 형식으로 사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후자는 말하자면 강렬한 충격이다. 마치 칼에 찔린 것만 같은, 하지만 도저히 어떤 문맥으로도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요소. 라캉식으로는 부분대상 혹은 ‘objet a’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하면, 왠지 알 수 없지만 사진의 한 요소(지극히 사소한 것일지라도)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이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푼크툼이 작동하는 하나로, ‘기록’으로서 사진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가 예로 든 것은 (사형이 집행된) 어느 사형수의 사진이다. 우리는 그 사진을 본 뒤, 피사체(사형수)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전해 듣는다. 그때 사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했던 존재를 보여주는 매개체가 된다. 존재했었을 존재의 부재. 바르트는 그때 우리의 감정적 동요가 바로 푼크툼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건 기록 자체의 특성이다. 기록은 기록하는 주체의 사라짐을 전제로 한다. 즉, 애초에 기록하는 내용을 알고 있는 주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록은 필요하지 않다. 결국, 모든 기록들은 주체의 부재를 근거로 한다. 기록이 남겨지는 순간 하나였던 시점은 주체의 시점과 기록의 시점으로 양분된다. 기록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하지만, 주체는 언제까지고 기록의 그 시점에 머무른다.

 

모든 기록물, 그러므로 다큐멘터리도 두 가지의 시점을 기반으로 한다. 앞서 제기한 문제가 다른 식으로 반복된다. 영화가 담은 모습과 당시의 실제 모습은 서로를 보완하는가. 전자와 후자는 동시에 서로의 근거이자 진술로서 기능하는가? 필연적으로, 카메라 속 영상은 실제 대상을 근거로 하지만, 카메라 속에 그 대상이 담기는 순간 그 대상의 존재 근거는 카메라에 있다. 불행하게도, 그리고 불가피하게도 그 둘 사이에는 시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위에서 말하는 행위와 기억이 그랬듯. 결과는 동일하다. 둘은 서로를 불가능한 방식으로 보증한다. 기록의, 다큐멘터리의 위치는 이러하다.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보여주는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존재하고, 자기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대상의 존재를 보증한다. 이러한 비대칭적 순환 위에 다큐멘터리가 아슬아슬 서 있다.

 

영화에서 이런 미묘한 뉘앙스가 드러나는 지점이 있다. 폴리의 아버지는 녹음 스튜디오 씬과 인터뷰 씬에서 두 번 등장한다. 그런데 둘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인터뷰 씬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있다. 카메라는 폴리의 아버지만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거기서 폴리 아버지의 시선은 폴리를 향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고정되어있으므로, 아버지를 향한 폴리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에 녹음 스튜디오 씬은 여러 쇼트로 컷되어있다. 편지를 읽는 폴리의 아버지를 담은 쇼트와 그걸 보고 있는 폴리의 옆모습을 담은 쇼트. 그러므로 내레이션 씬에서 아버지를 향한 폴리의 시선은 드러나지만, 폴리 아버지의 시선은 편지를 향해있다. 결국, 두 씬은 각각 비대칭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전자에서 ‘아버지->폴리’의 시선만이 드러난다면, 후자에서는 ‘폴리->아버지’의 시선이 드러날 뿐이다. 이렇게 둘은 불가능한 방식으로(서로를 응시하지 못함으로) 서로를 응시한다. 마치 다큐멘터리와 그 대상이 그러하듯.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