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인투 더 와일드> 로드 무비와 보이지 무비 사이의 삶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로드(road) 무비가 아니라 보이지(voayage) 무비로 봐달라.” 자신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꼽히는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 1991)에 대해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는 이렇게 말했다.

로드무비란 길(road) 영화, 쉽게 말해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다. 말하자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인물의 편력을 담은 영화가 바로 로드 무비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 하나를 들자면, 청년 체게바라(아르네스토 게바라)의 라틴 아메리카 여행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월터 살레스, 2004)가 있다.

 

보이지 무비는 로드 무비와 어떤 점이 다른 걸까? 보이지 무비는 ‘여행 영화’쯤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로드 무비와의 차이를 식별하기 쉽지 않다. 구스 반 산트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로드 무비는 여러 지역을 스치듯 지나가는 영화이지만, 보이지 무비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여행자를 좇는 영화다. 둘의 결정적 차이는 ‘정착’에 대한 의지의 여부다. 이런 의미에서, <인투 더 와일드>(와일드)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를 ‘보이지 영화’로만 알고 있었다. ‘쓰루(through) 더 와일드’가 아니라 ‘인투(into) 더 와일드’니까.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와일드>는 크게 세 부분이 교차편집 되어있다. 시기 순으로 살펴보자. 우선, 아마 가정용 캠코더 정도로 찍었을 법한 조악한 화질의 시퀀스가 있다. 그건 주로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에밀 허쉬 분)의 과거, 그중에서도 가족과 함께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두 번째로, 대학을 졸업한 직후, 북미와 멕시코 등지를 거쳐 방랑생활을 하는 시퀀스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알래스카에 가서, 즉 야생(wild)으로 들어가서 생활을 하는 시퀀스가 있다. 이 세 가지 부분들이 영화 내내 번갈아 등장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와일드>는 보이지 무비도 아니고 로드 무비도 아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보이지 무비와 로드 무비의 경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하나의 장르가 다른 장르를 시종일관 압도한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장르적 형식은 둘로 나뉜다. 그러니까 영화는 한 번은 보이지 무비의 형식을, 다른 한 번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한다. 구체적으로, 미국과 멕시코 일대를 방랑하는 두 번째 부분은 분명 로드 무비다. 반대로, 야생(알래스카)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거기서의 생활은 분명 보이지 무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는 그렇게 단순히 ‘로드 무비 + 보이지 무비’의 도식으로 나타날 수 없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위에서 나는 굳이 보이지 무비와 로드 무비를 나눌 때 ‘형식’이라는 제약을 걸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겠지만, 그건 이 영화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한 두 번째 부분에서 크리스는 단지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갈 뿐인가. 이상하게도, 크리스는 그곳들을, 그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는 않은가. 웨인(빈스 본 분)에게 끈질기게 바치는 편지, 잔(캐서린 키너 분)으로의 귀환, 그리고 크리스가 죽기 직전, 기어코 하나하나 호명되어 나타나는 ‘스쳐 간’ 존재들의 애잔하고도 몽환적인 디졸브 컷.

 

또한, 보이지 무비의 형식을 취한 세 번째 부분에서 크리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야생에서의 정착이었음이 드러나는가. 반대로, 크리스는 단지 야생을 경유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야생에서 돌아와, 책을 내겠다며 웨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크리스, 다른 이유 하나 없이, 단지 물이 불어났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허우적대던 씬,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유령처럼 회귀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존재.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 형식 간의 대립, 내용 간의 대립이 아니라 (이 둘에 대해선 마땅히 대립이랄 것도 없다.) 각 형식과 내용의 어긋남이다. 비유컨대 축하 파티에 가서 질투심에 똥 씹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여주는 것 사이의 괴리. <와일드>의 핵심은 아름다운 야생의 자연환경을 유려하게 찍은 쇼트나 ‘도전하라!’, 혹은 ‘두려워 말라!’ 등의 경구들이 아니다. 영화의 역사는 길고, 그런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와일드>만의 메시지, 그러니까 <와일드>의 가능성은 저 미묘한 어긋남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가족’이라는 코드다. 사실상 영화는 애초에 크리스가 가족(크게는 자본주의지만, 들뢰즈가 그랬듯 가족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단위다.)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와일드>는 표면상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청년의 성장기다.

 

두 번째 부분에서 크리스가 이곳저곳 방랑하며 돌아다니는 씬들은 곧 가족으로부터의 도피다. 그런데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가 그렇듯, 크리스는 마냥 가족을 잊고 그네들을 저주하기만 할 뿐인가. 중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생의 내레이션과 가족사는 무엇인가. 왜 영화는 계속해서 친절하게 크리스의 트라우마와 그것의 까닭을 제시하는가. 크리스가 지우려고 했던 트라우마적 가족은, 그러나 감춰져 있을 뿐이다. 크리스에게 가족이란 대상은 왜곡된 형태로 회귀한다. 이를테면 웨인이, 잔이, 트레이시(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그리고 마지막에 만난 프란츠(핼 홀브룩 분)이 그렇다. 로드 무비의 형식과 달리 끊임없이 정착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버지를, 가족을 부정하면서 시작했던 방랑 와중에 만난 의사(擬似)-가족, 혹은 대부/대리모적 존재들. 그네들의 존재는 크리스에게 크나큰 위협이자 동시에 부재하는 가족의 위치를 가득 메우는 휩쓸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부분. 영화는 마치 야생 속에서 크리스가 정착하는 것처럼 보여주지만, 크리스는 어딘지 계속 불안해 보인다. 그는 결국 집(그게 누구의 집이든)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운명 가혹했다. 말하자면, 크리스는 어쩔 수 없이 야생 속에 붙들린다. 그는 야생을 통과하려 했지만, 야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의지와 결과의 어긋남. 이 영화가 비극인 이유다. 그런데 이미 두 번째 부분의 어긋남에서부터 이 영화는 비극임이 예견되어 있었다. 크리스는 영화 자체가 그렇듯 이중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끊임없이 (대안적) 가족을 찾아 헤매지 않았나. 이 말은 곧, 그가 만약 누군가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가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도 된다. 영화뿐만 아니라, 크리스의 삶 자체가 로드와 보이지의 어긋남 위에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