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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정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돌아왔다. 4‧29 재보선을 승리해서일까? 대통령의 언변은 거침없었다. “부정부패는 반드시 도려내겠다”, "국민의 염원을 거스르는 것은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를 하는 것" 등 특유의 거센 표현이 빠지지 않았다. 한 가지 빠진 게 있다면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하는 측근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날(4일) 박 대통령의 발언은 대부분 사람들의 예측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재보선 결과만 놓고 보면 야당이 완패한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기실 선거에서 승리한 건 여당이지만 ‘정부=여당’ 프레임이 굳건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재보선 승리로 모처럼 청와대의 분위기가 한껏 고무됐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했을 박 대통령은 곧장 메시지를 내놓았다.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개혁

 

정치개혁, 참 좋은 말이긴 한데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경험으로 학습되었다. 수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항상 해왔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 현실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정치개혁 뒤에는 항상 ‘부패 청산 및 비리 척결’이 따라 붙는다. 부패와 비리를 없애야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명제 자체는 참 간결하고 쉽다. 그러나 디테일과 결과를 보면? 답이 빤히 보인다. 정치개혁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뤄졌다면 성완종 리스트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완종 리스트의 근본 원인은 자연 그 이름에서 기인한다. 성완종 전 경남회장의 죽음과 그가 남긴 리스트는 정치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 중 수사가 진행 중인 인사는 표면적으로는 2명에 불과하다(물론 이면에서는 또 다른 수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8명 중 2명이다. 느려도 너무 느린 거북이 수사다.

돈을 준 사람은 한결같이 말하는데 돈을 받은 이들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하는 기억의 왜곡 현상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망자는 말이 없다. 검찰은 수사에 협조할 귀인을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진정 정치개혁을 바란다면 수사에 협조할 이들에 대해 용기라도 불어넣어줘야 하지 않을까. 현 정권 실세들을 대상으로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현재진행형 사건에 맞서는 과거완료형 의혹

 

그러나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기억의 왜곡을 넘어 시간의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가까운 시일에 있었던 성완종 리스트는 온데간데없고 성 전 회장의 특별사면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마치 ‘성 전 회장이 애초에 사면되지 않았더라면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걸 강조하는 듯하다. 현재진행형인 사건에 과거완료형 의혹으로 대응하는 셈이다.

 

물론 성 전 회장의 특별사면에 대한 의혹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큰 사건을 덮어두기 위한 수단으로써 과거의 사건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미국 볼티모어 폭동 사태를 잠재우기 위해 미국 경찰이나 일부 언론이 사망한 흑인 용의자의 과거 범죄 전력을 공표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가장 시급히 의혹이 밝혀져야 할 문제는 현재진행형의 성완종 리스트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순서 없이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다가는 디테일을 놓친다. 박 대통령의 전방위적 정치개혁이 제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디테일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현재의 문제를 풀고 순서대로 과거의 문제를 하나하나 파헤치는 게 정치개혁의 가장 빠른 길이다. 빠른 길을 두고 구태여 돌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복잡한 의중이 궁금하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