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북 콘서트, 저자와의 대화 등의 행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감상하고 해석할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럼에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이하 <코끼리>) 공개토론회를 신청하고 직접 찾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책의 내용을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애꿎은 날씨 탓에 토론회는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다. 청년기고가 노정태 씨가 사회를 맡았으며 김민전 경희대 교수,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이상돈 중앙대 교수가 패널로 참석했다. 진보와 보수, 중도를 아우르는 적절한 패널 구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칭은 공개토론회였지만 실상은 각 학자들의 해석을 듣는 자리였다. 시간 관계상 독자들의 질문은 3개밖에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아쉬운 마음도 컸던 게 사실이다(준비한 질문을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토론회에선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패널들이 각을 세워가며 치열하게 논쟁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의 시선에서 희미하게 한국정당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이상돈 교수 “프레임은 하나의 방법론,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어”
<코끼리>의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 교수는 2004년 미국 대선의 패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프레임론을 주창했다. 미국의 진보세력이 패배하는 이유를 언어와 프레임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에 따르면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을 만드는 데 있어 미국 진보세력이 무능했기 때문에 2004년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요 진단이다.
미국 진보세력에서 레이코프의 지적을 받아들여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데 힘을 쏟았는지, 또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2008,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승리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정반대였다. 2007년 대선 이후 한국의 야당은 선거에서 (결과적으로) 무능한 모습만을 보여줬다.
진행자였던 노정태 씨는 <코끼리>의 프레임 담론이 한국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파고들었다. 미국과 한국 사회는 닮은 듯도 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보다는 한국 진보가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패널들의 의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상돈 교수의 발언이었다. 아마도 책에서 강조하는 프레임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견해 때문일 것이다. 그는 “프레임 논쟁은 야당의 면피적인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레임을 통해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는 건 하나의 방법론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 양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우석훈 교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는 “선거에 대한 진정한 자기반성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면서 “프레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은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시각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결국은 프레임도 중요하지만 그 프레임을 만들어 나가는 콘텐츠가 없으면 프레임은 속 빈 강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이해했다.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서구사회의 보수와 진보와 일치하지 않아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참여정부에서는 자신이 진보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시기였고 MB정부에서는 자신이 보수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시기였다”고 말했다. 이 말 속에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 의견에 대해선 모든 패널들이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패널들이 이야기한 것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한국의 보수는 엄밀히 말해 국가주의적 성격이 짙어 서구의 보수와 차이가 있다(우리나라의 보수는 대개 자유보다는 안보를 강조한다). 또 한국의 진보 역시 투쟁의 이미지가 강하다(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결국 한국의 보수는 보수답지 못하고, 진보 역시 진보답다고 말하기 껄끄럽다는 것이다.
결국 <코끼리>의 담론을 한국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지적한 셈이다. 레이코프는 미국의 보수를 엄격한 아버지 모델로, 진보를 자상한 부모 모델로 양분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미국의 그것과 정체성을 달리한다. 따라서 레이코프가 제시한 프레임 론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왜 맨날 지는가?
토론의 마지막 화두는 현재 야당이 처한 상황을 겨냥하고 있었다. 우석훈 교수가 현재 새정치연합의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기에 당사자의 생각이 유독 궁금했다. 그는 “야당이 선거에 지는 게 너무 익숙해졌다”며 입을 열었다.
또한 프레임을 짜는 데 있어서 과거 DJ가 내걸었던 서민을 위한 정당에 대해서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화자의 입장에서 서민을 말하는 것과 청자의 입장에서 서민을 듣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 또 서민을 위한 정책을 내더라도, 결과론적으로 여당을 지지하는 서민들이 많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이상돈 교수는 서민정당을 표방할 경우, 듣는 서민 입장에서 정치인들과 괴리감을 느낄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서민이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좋지 못한 선거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민전 교수는 선거 환경의 변화를 강조했다. 인구 구조적으로 2030 세대보다 50대 이상 유권자가 많아진 상황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거기에 지금의 젊은 유권자들은 10년 전 만큼 진보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결국 새정치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균열 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이었다. 그러나 야권이 그 정도의 역량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라 했다.
미국의 다양한 세력의 보수는 강점으로 작용하지만, 한국의 다양한 계파로 나뉜 진보는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중요한 지적이었다. 이상돈 교수 역시 “야권이 20대들이 투표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며 젊은 층의 투표 기피현상에 주목했다.
토론 말미에는 여권의 (안보 및 경제의) 공포 프레임, 세월호에 대한 일부언론의 악의적 프레임, 유권자를 프레임의 객체로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일반인 참석자의 질문과 그에 대한 패널들의 답변이 오고갔다.
<코끼리> 공개토론회가 남긴 과제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당장 다가온 총선과 대선에서 각 정당은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까? 또 유권자인 우리는 정당이 내걸은 슬로건과 그 이면에 있는 프레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만 할까?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 한다. 레이코프가 서론에서 강조한 말에서 일정 부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 재구성은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니다. 어떤 마법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프레임은 슬로건이 아니라 생각이다. 프레임 재구성은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에 접근하여 이를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그것이 일반 대중의 담론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반복하는 일에 가깝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부단한 과정이며, 반복과 집중과 헌신이 필요한 일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12-13쪽)
*사진 출처: 와이즈베리,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