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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 그리고 비틀린 희생양. 장강명, <표백>

세연이 자살하고 5년 뒤, 잇달아 발생한 사건들. ‘와이두유리브닷컴’의 적잖은 흥행과 ‘제자’ 세 명의 자살. 그리고 기대했지만 의도하지 않았던 또 다른 표백세대들의 자살. 사회적 이슈가 되긴 하지만, 간편히 수치화되어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 수(자살 사망률)는 (중략) 전년보다 1.1명 더’ 는 정도로, 혹은 ‘OECD 평균의 5배가 넘는’ ‘60세 이상의 자살률’(337)에 묻히는 정도로 끝맺음 될 것 같은 사건들. 세연이라면 죽음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아마 반은 성공이고 반은 실패? 아니면 ‘실명제’까지 신경 썼던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세연에게 묻는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정말로 세연은 죽음 이후에 무엇을 바랐던 걸까?

소설은 끊임없이 세연이 죽은 이후의 서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그녀의 죽음 이전을 불러낸다. 대화에서나, 잡기에서, 혹은 ‘와이두유리브닷컴’에서도. 그런데 죽음 이전의 세연과 세연의 죽음 이후의 세계의 반복적인 배열 사이에는 묘한 균열이 있다. 거기서 죽음 이전의 세연은 처참하며, 나름대로 계획에 맞게 흘러가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왠지 그 모든 것을 계획했던 세연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세연에 대한 질문은 마땅히 죽음 ‘이전’을 향해야 한다. 죽음 이전의 세연은 무엇이었는가?

 

- 신

 

“하나님이 등장하면 모든 게 망가져 버려.”(20) ‘나’의 자취방에서 한 이 말에서 얼핏 세연은 어떠한 절대적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중심을 거부하는, 그러니까 소위 포스트 모던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의 리좀이 그러하듯 ‘어떤 지점도 뭔가 다른 것을 위한 시작 내지는 접속점을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 상대주의, 좀 나쁘게는 니힐리즘. 그리고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의 ‘표백세대’. 하지만 세연은 좀 다르다. 그녀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자유의지’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외부에서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세연은 거기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의 중심에 서”(21)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정한다.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것은―세연이 어떤 의미로 그 표현을 썼든지 간에―사실상 ‘신’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중심은 ‘신’이 될 수도,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혹은 ‘왕’이 될 수도 있으나, 이들은 모두 동음이의어들이다. 중요한 건 모든 것들의 중심이라는 숭고하고도 상징적인 위치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말한 ‘초코드화’의 상태. 모든 폭력적 과잉을 떠맡은 ‘제로기호’(혹은 중심)의 상징성 아래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무정부적 상태에서 구제받은 개별자들. 신, 왕, 혹은 어떤 지배이데올로기 등의 절대적 명령 아래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말하자면, 전근대적 존재들. 이상하게 세연은 스스로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출발점은 왕의 목이 잘리고 신은 일찍이 죽임을 당했으며 어떠한 지배 이데올로기도 불가능한 포스트모던이지만, 도착지는 전근대라는 기이한 역행. 모든 절대적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모든 것들의 중심이 되려는 이상한 역설.


하지만 지금 정말로 왕은 간단히 죽고, 신은 관념 속에서나 간신히 존재할 뿐이며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데올로기는 종언 됐을까. 그렇다면 세연은 앞뒤 안 맞는 소리나 해대는, ‘나’가 계속해서 말하듯 그저 ‘미친’ 존재일 뿐일까? 신이 죽은 시대에 신이 되겠다는 건 한낱 개인적인 정신병에 불과한 소리이므로 그냥 무시하고 끝내면 될까? 하지만 일찍이 마르크스는 사라진, 혹은 억압된 상징들의 기이한 귀환에 관해 얘기한 바 있다. 1789년 프랑스 왕의 목은 분명히 잘렸지만, 1848년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는 보란 듯이 황제로 등극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의 화폐에 대한 집착을 조롱하고 ‘화폐는 환상일 뿐’이라며 비아냥거렸지만,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공황 때면 언제나 사람들은 화폐를 더 모으지 못해 안달이 났다. 히틀러는 어떻게 독일을 이끌어갔으며, 자본주의는 왜 끊임없이 위기에 직면하는가. ‘초코드화’ 이후의 세계, 그러니까 숭고한 상징이 끌어내려 진 뒤 어떤 무지막지한 (자본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절대적 탈코드화’의 세계에서 그러나, 모든 것은 단지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어떤 위기의 상황, 질서의 어긋남이 닥치면 신은, 왕은, 이데올로기는 언제든지 왜곡된 형태로 회귀한다. 그건 라캉이 말한 ‘실재의 침입’과 유사하다. 언어에 의해 억압된 불가능한 욕망의 불가해한 침입. 그렇다면 세연은 단지 ‘미친’ 개인이 아니다. 세연의 중심이 되겠다는 계획은 역설적이게도 위기를 맞은 ‘표백세대’의 시대정신을 대표한다. 스스로 말하기도 했듯, 그녀는 “시대정신을 꿰뚫어봤”(144)던 것이다.     


그런데 중심을 말한 세연은 중심을 향하고 있는가? 정말 세연은 신이 되기 위해서 신을 거부했던 걸까?

 
- 인간

 

사실 그녀의 행위가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세연 스스로는 신이 될 생각이 없었다. 생각과 행위의 불일치, 혹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그랬듯) 사이비적인 결합. 세연이 말한 중심은 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이 곧 중심이므로, 세연은 결코 중심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찰스 맨슨을, 케네디를 꿈꿨다. 신이 아니라 범죄자를, 황제가 아니라 ‘오직 상징으로서만 기능하는’(287) 대통령을 이상향으로 삼았다. 그마저도 잡기에선 케네디 부인의 이름(재클린)을 자신의 별명으로 삼아 케네디에게서 벗어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계속해서 중심으로부터 일정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세연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충격과 오점을 남기기 위해 자살했다. 세연은 “너의 죄를 사하노라.” 말하지 못했고,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336)랐다.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임무를 완수하고 여지없이 하늘로 올라갔으나, 세연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순교자들에서 이르러 비로소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116)할 수 있었다며 그리스도 이후를 보았다. 그렇지만 세연에 대해서라면 위에서 말했듯이 죽음 이후를 생각해선 안 된다. 세연은 사회를 바꾸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가 자살은 한 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151) 나는 세연에게서 ‘몇 명의 자살로 사회가 바뀌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그녀 죽음 이후의 세상은 사실상 관심 밖이었다. 그러면 신이 되려는 것도 아니었고, 사회가 바뀌기를 꿈꾸지 않았던 세연은 왜 자살을 감행했을까?


자살로 사회가 바뀌지 않아도 좋다고 한 뒤 세연은 덧붙였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가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의했다.’(151)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는 항의했다’는 것이다. 세연에게 중요한 건 사회가 아니라 ‘우리’였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상 세연과 그녀의 제자들이었으므로, 궁극적으로 우리란 제자들을 이끈 세연 자신이었다. 이 선언에서 세연은 다분히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해) 합리적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달리 말해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똑똑한 세연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78) 속 ‘표백’된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갈 궁리를 하다가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서(=이해와 부합하는) 자살을 택했다. 나쁘게 말하면 세연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자살했다. 그녀는 신이 되려는 것도 아니었고, 사회를 바꾸려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과장하면, 그녀는 단지 찰리 맨슨이나, 케네디, 그리고 마르크스나 도스토옙스키처럼 후대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다. 자살은 그녀의 개인적인 욕심의 발현이자 극단적인 자기 홍보의 수단일 따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추나 병권은 말 그대로 “세연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나 마찬가지였”(317)다. 소설에서 세연이 자살을 개인적인 욕망의 차원에서 결정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왜 찰스 맨슨만 그렇게 유명해졌을까?”(16) “시시한 일을 추구하면 사람의 값어치도 낮아져. 실패하더라도 굉장한 걸 쫓아야 해.”(69)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압도적인 재능을 펼쳐 그 주변으로 그 개인이 지닌 색의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어.”(77) “나는 순교할 기회를 잡은 예비 성인이야. 이 죽음은 내 인생을 완성하는 거야.”(144) ‘아무도 자살하지 않는다면 재키가 처절하게 패하는 거다.’(219) 등등.


또한, 같은 의미에서 인간적인 세연은 끊임없이 죽음을 두려워했다. 잡기 후반부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불안, 초조, 강박들이 이를 보여준다. 세연의 인간적인 이해관계는 이렇게 충돌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유명해지겠다는 목표사이의 갈등. 갈수록 전자가 후자를 압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살을 택했다. 그렇다면 세연은 마지막에 비합리적인(인간적이지 않은) 선택을 했던 셈이다. 죽음이 그렇게도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 비틀린 희생양 

 

요지를 명확하게 짚기 위해선 질문을 좀 다르게 반복해야 한다. 죽음이 그렇게도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세연이 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이전에 세연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 처음 자살을 구상했던 건 세연이었지만, 결국에는 세연도 자살을 강요받았다. 세연의 자살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세화 때문에? 직접적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나’와의 대화에서 세화가 자살을 주저하는 세연에게 어느 정도의 압력을 가했다는 건 유추해낼 수 있다. 그럼 세화가 없었다면, 혹은 세화가 아닌 그 누구라도 세연에게 자살을 계속해서 종용하지 않았다면 세연은 살았을까? 그러나 세연은 결코 ‘누구’ 때문에 자살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하고 지나쳤던 세연의 행동과 생각 사이의 괴리.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해보자. 신을 향하는 세연과 인간으로서의 세연. 그 사이의 균열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들 중 단 한 사람이 모든 폭력 <모방>에 책임이 있다고 확신하고, 그 한 사람을 모든 사람을 오염시키는 <오점>으로 보고, 또한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 믿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만장일치 한다면 이 믿음은 정당화될 것이다.’ ‘그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된다. 성스러워 죽이면 안 되지만, 죽어야만 성스러워지는 존재. 세연은 결국 희생양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원했듯 모든 폭력적 과잉들을 떠안고 <오점>이 되어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애초에 세연은 희생양이라기엔 자발적이었다. 그녀는 책임을 떠안고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맡기며 스스로 제단으로 올라갔다. 세연은 신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똑똑했으며, ‘표백세대’의 시대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어느 정도 가벼운 마음으로 제단을 향했다. 제단 앞에서까지 현명한 그녀는 스스로 희생양이 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발이 내딛는 곳은 현실로 침입해 들어오는 실재의 세계, 혹은 숭고한 자리였다. 제단 위에 누운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소스라치듯 몰려왔다. 제단을 둘러싼 수많은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정작 무서운 건 ‘누구’의 시선이 아니라 칼을 든 자신의 손이었다. 자신이 누워 버린 제단이라는 공간이었다. 세연을 제외한 그 누구도 칼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칼을 집은 채 제단으로 올랐었다.

 

그 위에서 자발적으로 희생을 선택한 세연은 희생양이었지만, 비틀린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비틀림’은 숭고한 자리와 인간성 사이의 어긋남에서, 비유하자면 ‘새로운 천사(Angelus Nobus, 파울 클레)’의 시선과 바람의 맞부딪침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세연을 찌른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지만, 동시에 자기를 둘러싼 외부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연은 죽었다.    

 

* 사진출처: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