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광화문을 지나다가 이순신 동상 앞 세월호 유가족들의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매번 무심결에 지나치던 천막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가족은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혹자는 이제 세월호법이 통과됐는데 왜 여전히 광화문을 ‘점거’하고 있냐며 그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제 천막 주위에는 적막함이 가득하다.
용기 있는 누군가는 말한다. “여기서 가장 힘든 분들은 유가족들입니다. 그분들 힘내시라고 격려하는 게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세월호 사태가 일어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동안 소통은 온데간데없고 독선과 아집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용감한 시민들은 계속해서 등장했지만 유족들을 조롱하는 상식 이하의 인간들도 난립했다. 천막 안의 유가족들은 그렇게 상처가 아물기 전 새로운 상처를 마주쳐야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작 욕을 먹어야할 쪽은 유족을 조롱하는 무리들뿐만은 아니다. 사실 비판을 받아야 할 이들은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었던 대다수 무리, 즉 나를 포함한 침묵한 군중들이다. 우리는 적어도 어느 편의 주장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천막 안에서 잠자코 듣고 있을 유족들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고 홀로 설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민의 용기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구경했다. 마치 자신들의 일은 아니라는 식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은 소통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반대의 입장을 경청하고 그것을 조율해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주의는 변질되고 있다. 소통과 참여는 줄어들고 구경꾼만 늘어나고 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소통과 공감의 몸짓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시민들은 항상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거칠게 말해서 침묵주의자들은 극단주의자보다 더 무능하다. 조용한 군중은 통치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권력을 주고 만다.
천막은 여전히 이순신 동상 앞에 있다. 400여 년 전 백성을 위해 충을 다한 충무공이 오늘날의 광화문에 살아 돌아온다면 개탄의 눈물을 쏟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 지금의 우리나라는 국력에서부터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충무공의 재현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 충무공이 될 수 있는 여건임에도.
사진 출처: 팩트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