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영화는 아무런 정보 없이 봐야 제맛이다. <엘리펀트>를 무턱대고 봤다. 처음엔 별다를 것 없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단조롭게 다룬 영화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 영화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여줬다.

<엘리펀트>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그어져 있다. 둘 다 같은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영화가 보이는 방식은 전반부와 전혀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아예 별개로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앞뒤는 동떨어져 있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가? 

 

 

전반부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을 따라가며 그네들의 일상을 담는다. 다소 지루할 정도로.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그네들은 모두 나름 고민거리와 갈등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렇게 ‘던져진’ 현상에 대한 파악 정도가 가능할까. 예컨대, 존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군, 미쉘은 어딘가 불편하군, 알렉스는 왕따를 당하는군. 이 정도가 전부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단서를 영화는 결코 속 시원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는 뚜렷한 구심점이 없다. 이것은 저것이었다가, 또 저것은 이것이 되기도 한다. 비유컨대, 영화의 전반부는 원심력이다. 영화는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없는) 중심에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전반부에서 영화는 풍경을 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사실상 초반에 소개되는 여러 인물들도 학교 풍경의 하나다. 인물의 뒷모습을 담으며 그의 행로를 좇는 씬이 그렇다. 거기서 담긴 인물은 분명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체지만, 동시에 관객은 그저 그의 뒤통수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또, 그들은 학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먼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가. 분명 포커스는 인물의 뒷모습에 맞춰져있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그리고 풍경들은 아웃포커스 되어 있다. 그렇지만, 고작 뒷모습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다만 나는 그 씬들에서 지나치듯 흘러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던 인물은 어느새 흘러가는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주체와 풍경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다.

 

다음 씬들은 또 어떤가. 미쉘(크리스틴 힉스 분)과 네이선(네이선 타이슨 분)이 처음 등장하는 씬. 남학생들은 과격한 운동을 하고, 여학생들은 체조를 하고 있는 운동장을 멀리서 잡는다. 거기서 모든 인물은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네이선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후 카메라는 그를 좇아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쉘은 그저 (좀 이상하지만) 여학생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농구 코트 안으로 들어온 미쉘을 멀리서 잡은 씬. 미쉘의 뒤를 계속 좇던 쇼트는 그녀가 농구 코트 문을 열자마자 아주 멀리서 그녀를 잡는 쇼트로 이어진다. 그녀는 갑자기 작아져 있으며, 거기선 오히려 주변 풍경이 압도적이다. 

 

또한, 중심인물과 주변 인물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 주인공인 줄만 알았던 존(존 로빈슨)이 어떤 씬에서는 주변 인물로 등장하고, 또 다른 씬에서는 아예 엑스트라 정도로 비친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으로, 다른 시점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 존과 엘리어스(엘리어스 맥코넬 분), 그리고 미쉘이 마주치는 쇼트들을 보자. 나는 세 번째 반복된 쇼트에서야 겨우 미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부주의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게, 그전 두 번째 쇼트까지 영화는 미쉘을 그저 달려가는 여자 정도로 아웃포커스해서 보여줬다. 이런 식으로 영화 전반부는 다양한 중심인물=주변 인물들의 독립적인 행보를 하나하나 좇는다. 

 

후반부는 전혀 다르다. 분명한 중심인물이 존재한다. 알렉스(알렉스 포르스트 분). 거기다 에릭(에릭 듀런 분)까지. 전반부가 원심력이었다면, 후반부는 구심력이고 블랙홀이다. 전반부에서 각자의 개성적인 시간을 가졌던 중심인물들이 후반부에서는 모두 주변 인물로 전락한다. 파편적 전체를 이뤘던 개인들의 시간은 알렉스들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다. 물론 존은 예외일 수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 등 그는 알렉스들과 별개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할 만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후반부에 그가 하는 역할이라곤 사실상 학교 외부에서 알렉스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대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관해서는 베니라는 인물이 상징적이다. 그는 영화 후반부에 ‘처음’ 등장한다. 영화는 마치 전반부에 그러했듯, 새로 등장한 베니를 중심인물로 다룰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므로 에릭과 맞닥뜨린 씬에서 베니의 행동에 대한 나의 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무기력하게, 아니 그런 판단조차 섣부를 정도로 허무하게 죽는다. 이쯤 되면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왜 감독은 굳이 주변 인물에 불과한 베니를 마치 중심인물인 것 마냥 속였을까. 그건 알렉스들이라는 무지막지한 구심력, 블랙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중심인물로 여겼던 존재마저 주변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그네들의 확고한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조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멀어질 것만 같다가 한순간에 블랙홀처럼 모든 것이 중심을 향하는 순간. 단조로운 일상만이 무미건조하게 제시되다가 돌연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모든 인물이 중심인물=주변 인물인 줄 알았지만, 사실상 그네들은 모두 알렉스들을 보이기 위한 전제(주변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뒤덮는 충격을 위해 80분을 할애했던 것은 시간 낭비였을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늙은도령 2015.02.11 20:46 신고

    한 번 봐야겠네요.
    퍼즐조각을 맞추는 영화라면 재미있을 듯싶네요.

    • 별밤 별밤러 2015.02.11 22:42 신고

      감사합니다. 퍼즐조각을 맞춘다기 보다는 무중력의 우주를 지나다가 돌연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증언' 이라는 형식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예요. 늙은도령님도 바쁘시겠지만 꼭 보시길!^/

  2. 달다래GGM 2015.02.13 19:42 신고

    이 영화를 보진못했지만 포스팅만으로 도 재밌어보이네요
    조만간 한번 봐야겠어요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