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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쿠바와 미국 사이에서

조만간(2월 26일)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이 개봉한다. 빔 벤더스의 영화 중 내가 본 거라곤 <베를린 천사의 시>(1987)가 전부였다. 물론 그 한 작품만으로 빔 벤더스란 이름은 내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되었다. 하지만 그의 다큐멘터리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에 <제네시스>를 보기 전, 선행학습의 하나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봤다.

흔히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음악 영화로 알려졌다. 실제로 영화에선 낯선 듯 낯익은 풍의 음악들이 여러 방식으로(공연 실황, BGM 혹은 가벼운 연주/노래) 흘러넘쳤다. 그런데 영화가 오직 음악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연히 영화는 소리뿐만 아니라 영상을 송출하는 매체다. 아무리 음악 영화라고 해도 거기서 단순히 ‘음악’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다. 나는 영화에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개인들과 그들이 구성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부에나), 그리고 그것이 속한 쿠바와 그 대척점에 있는 미국이 나타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일단 영화에서 등장하는 개인들과 그들이 뭉쳐 만든 ‘부에나’의 관계를 살펴보자. 영화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부에나’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하나하나 내러티브로 담은 시퀀스, 그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부에나’가 공연한 실황을 그대로 담은 영상이 있다. 이 둘은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하는데, 교차편집 되어있다. 그러니까 개인의 인터뷰(과거사, 혹은 음악에 대한 지극히 사소한 내용)를 담은 씬 이후 갑자기 공연 실황 씬이 이어지다가 다시 다른 인물의 인터뷰 씬이 이어진다. 그 둘의 이음매 역할은 음악이 한다. 음악은 아슬아슬하게 연결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미국 뉴욕에 간 ‘부에나’의 모습을 담은 시퀀스와 미국 뉴욕 카네기홀의 시퀀스로 구성되어있다. 이 또한 교차편집 되어있다. 이를 종합하여 도식적으로 나타내면, 영화는 ‘쿠바(개인 인터뷰)/암스테르담(공연 실황)-뉴욕(구경)/카네기홀(공연 실황)’의 구조로 되어있다. 

 

쿠바의 모습을 담은 시퀀스에서 개인의 인터뷰들은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사이사이에는 암스테르담 공연 실황이 교차편집 되어있다. 그런데 매번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는 씬은 다큐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위적이다. 미쟝셴, 과도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누가 봐도 감독과 합을 맞춘 게 뻔한 인물들의 연주, 움직임, 시선. 이러한 씬들을 볼 때마다, 그러니까 매번 새로운 인물들이 소개될 때마다 나는 왠지 <소림 축구>(주성치, 2002) 전반부의 구성방식이 떠올랐다. 거기선 다양한 곳에 엄청난 능력을 숨기고 살던 인물들이 순서대로 등장한다. 각 인물이 등장하는 씬은 그네들의 숨겨진 능력을 짐작할 만한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에나>에서 인물을 소개하는 씬들도 (물론 그 분위기는 상반되지만) 재야의 숨은 고수들을 찾아가는 <소림 축구>의 구성과 유사했다. 특히, 무슨 궁전 같은 곳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피아노를 치고 있는 루벤을 빙빙 도는 쇼트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런데 <소림 축구>와 <부에나>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뛰어난)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사실상 ‘부에나’는 암스테르담 공연 실황에서나 제대로 나타난다. 영화는 전적으로 개인을 다루는 씬과 전적으로 ‘부에나’라는 집단만이 등장하는 공연 실황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영화에선 뛰어난 개인들이 ‘부에나’라는 이름으로 뭉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 혹은 여러 미묘한 충돌을 과감히 생략했다. 물론 그네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 의존이 형성되는 과정도 과감히 생략했다. 이건 분명히 감독의 의도다. 없어서 안 넣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멀리 떨어져 살던 이들이 음악을 하기 위해 한시에 한 공간에 모였다. 거기서 무슨 일이든 발생하지 않을까. 다툼이든, 사랑이든, 공감이든, 갈등이든.

 

<부에나>의 교차편집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영화에선 공연 실황이 먼저 제시된다. 물론, 그 앞에 몇 개의 쇼트가 있긴 하지만 ‘부에나’ 혹은 개인들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부에나’라는 전체를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야 개인들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개인들은 이미 ‘부에나’에 소속된 개인이다. 이건 영화(영상) 편집의 힘이다. 영화에서라면 시간은 역행할 수 있고, 인과관계는 쉽게 뒤집어진다. 그러니까 영화는 애초에 개인들이 ‘부에나’의 소속원으로서 존재함을 보여준다. 개인은 전체로서 존재하고, 전체는 또한 개인들로서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갓 태어난 아이와 국가의 관계랄까. 이는 일종의 선전포고다. 이렇게 초장부터 개인과 집단의 간격을 없앰으로써, 감독은 과감히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부에나>에서 중간 과정의 생략에도 불구하고 ‘부에나’로서 개인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된 방식에 관해 얘기해보았다. 그런데 더 나아가 영화는 ‘부에나’에서 쿠바를, 쿠바에서 ‘부에나’를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는 끊임없이 쿠바의 풍경을 담은 쇼트들을 제시한다. 이건 단순히 풍경의 제시가 아니다. 쿠바는 쿠바라는 이름만으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 거기다 감독은 그것을 별로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암스테르담 공연 실황 이전, 영화에서 처음에 굳이 (사진으로) 등장하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혹은 쿠바의 국기. 엄청난 크기의 시가를 물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 곳곳에서 등장는 체게바라의 형상.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앵글에 담은 건물의 낡은 간판, ‘Karl Ma x’.

 

그 반대편에는 미국이 있다. 인물들에 대한 소개는 전반부, 그러니까 쿠바에서 이미 다 끝났다. 전반부를 통해 영화는 ‘개인=부에나=쿠바’라는 도식을 완성해 냈다. 이후 미국 뉴욕을 누비는 개인들은 쿠바 자체다. 미국 뉴욕을 쿠바가 누비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어떠한 메시지도 던지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용이랴! 미국을 거니는 쿠바, 그 자체가 있을 뿐이다. 그저 뉴욕 시내를 관람하는 개인들을 좇을 뿐이지만, 결코 그 시선, 움직임, 발걸음, 대화가 가볍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 카네기 홀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담은 영상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미국 카네기홀에서 펼쳐지는 쿠바 국기는, 1시간 30분 동안 영화를 좇아온 관객들에게 말하자면 변증법적인 완결(정-반-합)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가! 

 

*사진출처: 구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