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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우리선희> 솔직히 말해줘, 다만 내가 원하는 걸

“선희야!” 세 명의 남자가 여자를 부른다. 여자는 ‘선희’로 호명된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여자에게 여러 속성을 강제한다. 제목에서처럼 여자는 ‘우리(의) 선희’가 된다. 여기서 방점은 ‘우리’에 찍혀야 한다. 우리가 없다면 선희도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선희는 정말 일방적으로 호명을 당하는가? 우리는 영화에서 ‘진짜’ 선희를 고민해야 하는가? 다시, “선희야!” 세 명의 남자가 여자를 부른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건 “선희야!”가 결코 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희야!”는 오히려 대답이다. 선희의 부름에 대한 반응이다. 애초에 선희(정유미 분)는 영화로 침범해 들어온다. 동현(김상중 분)은 대학의 벤치에 앉아 있었고, 문수(이선균 분)는 건널목에서 막 후배와 헤어졌으며, 재학(정재영 분)은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프레임 밖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선생님!” “김문수!” “감독님!” 그제야 선희는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며 발견된다. “선희야!” 그들은 답한다. 이후 선희는 당연히 대답이 아니라 그녀의 말을 쏟아낸다. 그러므로 ‘우리 선희’에서 방점은 ‘우리’가 아니라 ‘선희’에 찍어야 한다.

 

여러 번 마련되는 대화 자리들에서 기묘하게 반복되는 말이 있다. 발화자들을 에두르는 말. 그 말을 들으며 기분 나빠하는 청자에 의해 다시 발화되고야 마는, 결국 남는 것은 말뿐인 그런 말. “한 우물만 끝까지 파!” 처음 이 말은 선희가 동현에게 듣는다. 선희가 동현을 찾아갔던 건 유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다. 유학은 위기에 맞닥뜨린 선희가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고, 위기란 그녀가 말한 대로 스스로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좌절이다. 영화판에 대한 실존적 고뇌의 순간이다. 여기서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이상을 좇으며 끝까지 부딪쳐보거나, 유학으로 도피하거나. 전자는 영화의 모든 인물이 술자리에서 마주한 대상에게 말하는 바대로 한 우물만 파는 것이다. 거기서 선희는 재학이 문수에게 소리 높여 말했듯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 누군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두려운 일이다. 그런 두려움에 빠진 선희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 즉, 유학을 택한다. 당연히 동현에게는 그저 도피로 보일 뿐이다. “나는 말이야, 니가 지금 힘들어도 끝까지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이후로 이 말은 부정과 긍정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돌고 돈다. 동현에게서 선희에게로, 선희에게서 문수에게로, 문수에게서 재학에게로, 다시 재학에서 선희에게로. 이렇게 말이 돌고 도는 건 모든 인물에게 있어서 진정 나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러한 두려움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은 심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진실과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 문장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모순이다. 왜냐하면,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두려워할 게 아니라 마땅히 환영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마땅히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남에게 요구하기는 쉽지만, 막상 자기는 두려워서 머뭇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희는 그녀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과 달리(“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변화는 무슨 변화야.”, “저한테 진짜 중요한 건 제가 누군지 아는 거예요.”, “이것도 진짜 저랑 비슷한 거예요?”) 진짜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녀가 ‘나를 찾으려’는 것은 바로 나를 잊으려는 것, 즉 진짜 나로부터 도피하려는 행위다. 왜냐하면, 나라는 진실은 불편할 게 뻔하니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 진실은 진실이므로 쉽게 거부할 수 없다. 그녀가 진실을 요구하는 텅 빈 제스처를 끊임없이 내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중적인 욕망의 충돌 때문이다. 어떻게 선희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짜 자기를 찾으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

 

라캉에 따르면 ‘상블랑’은 ‘‘무의 가면(베일)’이다. 상블랑은 베일과도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무)을 감추는 베일이다. -베일 아래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의 기능이다.’ 비유컨대 상블랑이란 제욱시스와의 그림 대결에서 파라시우스가 그린 ‘커튼’과도 같다. 그런데 중요한 건 상블랑 자체가라기 보다는, 상블랑에 직면한 인간의 인식이다. 인간은 눈앞에 있는 베일 속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텅 빈 공백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일이 마치 엄청난 것이라도 숨겨둔 것처럼 믿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선희가 ‘진짜’를 언급하는 모든 메시지는 텅 비어있다. 그녀는 보기와는 달리 절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조차 그녀는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속이고 있으니까. 동현, 문수, 재학 이 세 남자를 미끄러지듯 경유하며 선희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대화를, 물음을, 말을 건넨다. 

 

진짜 자기라는 중심에서부터 (자기도 모르게) 점점 멀어져만 가는 선희는 결국 어디를 향하는가. 선희는 자기를 수식하는 수많은 형용사(용감하다, 소심하다, 귀엽다, 솔직하다, 또라이 같다 등)들을 헤집으면서도 질문을 반복한다. 그건 그녀도 자신을 속이면서 진짜 답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희는 처절하게 질문하면서도 질문을 벗어나는 대답을 원(하지 못)한다. 그것은 언어를 벗어난 영역이다. 선희를 욕망하는 남자들의 임무는 선희의 숨겨진 진짜 질문을 찾아내는 것이다. 선희의 질문은 질문 밖에 있다. 그건 말하자면 굉장히 까다로운 수수께끼이다. 이를테면 ‘문제를 다 읽고 답하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수수께끼. 진짜 문제는 그 문장 아래 번호가 달린 일련의 문제들이 아니라, 그것을 지시하는 ‘문제를 다 읽고 답하시오’라는 문장 그 자체인 수수께끼. 혹은 ‘선택의 자명함이 명백한 순간이야말로 속임수가 완전한 순간’. 
선희의 질문은 동시에 메타적인 시선을 요구한다. 우선, 선희는 던진 질문을 서둘러 가리곤 한다. 시선은 질문을 둘러싼 모든 것을 향하게 된다. 아마 섹슈얼한 눈빛, 제스처, 손과 손의 마주침, 키스, 혹은 섹스를 통해서. 또한,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기도 한다. 진짜 그녀의 모습을 지우고,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그런 선희는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선왕을 죽인 자를 말하라는 오이디푸스와 닮았다. 테이레시아스는 말한다. “그대는 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늘부터는/여기 이 사람들과 내게 한 마디 말도 걸지 마시오./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화를 내다 멈칫하고 묻는다. “무슨 말을? 잘 알 수 있도록 다시 말해보시오.” 그리고 다시.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소.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끔찍한 진실에 대한 저항. 오이디푸스는 결국 진실을 받아들이지만, 선희는 최소한 동현에게서는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것 같다. 영화에서 선희가 유일하게 만족하는 장면은 다시 쓰인 추천서를 대할 때뿐이다. 동현의 두 번째 추천서는 거짓말이 아니라 ‘처음’ 마주한 문제에 대한 진솔한 대답이다. 벅차하며 선희는 동현에게 묻는다. “이것도 진짜 저랑 비슷한 거예요?” 그 말 앞에는 이런 말이 숨겨져 있다. “그래요. 이런 게 내가 원했던 대답이에요. 이제야 솔직하시네요.” 그렇게 원하는 대답을 얻은 선희는 남자들에게서 사라진다. 선희가 사라진 창경궁에서 남자들은 비로소 선희의 까다로운 질문에서 자유롭다. 그때 선희에 대한 동현의 말은 번복된다.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솔직하게.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