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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18. 네모난 세계

 

같은 자리를 반복할지라도 몸에 닿는 락스 냄새가 좋다. 게으름의 면피라도 온몸의 세포들 사이로 파고드는 듯한 새벽의 차가움이 좋다. 한 번 몸에 익힌 감각은 소멸되지 않는다. 물길 사이로 흘러가는 발은 자연스럽게, 오래돼 잊혔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감각들을 다시 살려내 되풀이한다.


 

적막할 수 없으나 적막한 적막함이 주는 아스라함 속에서의 자맥질. 공간은 네모로 가득하다.


피곤에 절은 채 초롱초롱한 눈빛들과, 그 눈빛들에 어울리지 않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던 날.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삶. 바라건대 그 많은 꿈들로 가득한 눈빛들이 실망 속에서 시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한 유물의 그림자를, 혹이라도 꿰뚫어볼까 느낀 두려움의 순간들.

 

다만 그 날의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은 먹을 것을 전해주는 것이었으므로, 비겁한 침묵에 조용히 면죄부를 준다. 각지고 노랗고 비싸지만 다소 작았을 그 카스테라는, 그럼에도 기억과 시간들을 잇고자 하는 이들의 작은 허기정도는 달래줬을까. 쓸모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걸어 다니는 공간도, 읽어야만 하는 그 무수한 텍스트들도, 좋아하는 스승의 얼굴도, 온몸을 감싸 안는 물빛도, 그리고 좋아하는 빵도 네모난 이 세계. 각지고 모나지 못해 시들시들하고 별 볼일 없는 삶의 모습을 어떻게든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끊임없지 제자리걸음하는 이 시간들. 네모가 아닌 사람이 네모가 되기 위해서, 삶에 각을 세우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차가운 봄볕의 세계,

 

이 두근거리도록 네모난 세계.


내가 기억했지만 기억하지 못했던 세계를 다시 살아간다. 살아왔던 그 모든 일이, 쓸모없어 보였던 그 모든 삶이 결국엔 결코 부질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도.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