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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단막극 다시보기

[단막극 다시보기] 시간이 흘러도 통하는 미생, 서른 살의 이야기 <82년생 지훈이>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를 이끄는 건 16부작 이상의 긴 호흡을 가진 드라마다. 하지만 제작진들이 처음부터 그런 드라마를 만들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특히 작가의 영역은 더욱 그렇다. 작가가 명작이라고 불리는 장편 드라마를 써내는 힘은 단막극을 쓰면서 실력을 다진 것에서부터 나온다.

작가는 한 회 분의 70분 단막극을 완성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주로 아는 드라마 작가들의 시작은 단막극에서부터였다. 짧은 이야기 안에 모든 걸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낭비하는 장면 없이 메시지를 이어간다. 그렇기에 단막극을 제대로 이해하고 보면 장편 드라마의 메시지를 더욱 깊이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단막극이 약세로 돌아간 요즘이지만 몇 년 전 방영된 단막 중에 다시 봐도 공감되는 것이 있었다. 작년 하반기를 뒤흔든 tvN 드라마 <미생>이 보여준 젊은이들의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잘 보여준 단막극을 소개하려 한다. 2010년 KBS 단막극 공모에서 당선해 2011년 방영된 <82년생 지훈이>라는 작품이다.

 

웹툰 <미생>이 처음으로 다음에 연재된 시기는 2012년 초다. 드라마는 3년이 지난 후에야 만들어졌다. 하지만 사회적인 파급은 2014년 때가 훨씬 컸다. 비정규직의 애환과 회사생활의 고단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졌기 때문이다. <82년생 지훈이>도 <86년생 지훈이>로 바뀌어 올해 방영된다면 더 큰 화제가 될 것이다. (실제로 극본 당선 때는 제목이 81년생 지훈이였다.)


 

82년생의 지훈이는 2011년에 서른을 맞이한 청년이다. 그는 자산관리사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1년 계약직이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YES만큼은 잘하는 남자지만 그가 서있는 어느 자리에서도 그는 죽을 것 같고 미칠 것만 같다. 회사에서 치이고,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아버지에게 뺨맞는 그다.  


 

영업을 하기 위해 고객 아들의 급식봉사를 나가고, 고객의 고스톱 게임을 돕다가 아줌마들에게 팔을 밟혀 다치고, 여자 친구와 살 집을 마련하려 부모님에게 돈을 구해보려 하지만 역시 잘 되지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그는 급식봉사를 나가준 고객 아들의 친척 500억대 자산가 고기봉의 계약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고 계약 성사를 위해 고기봉의 주변을 맴돈다.

 

지훈은 여자 친구와도 관계를 회복한다. 여자 친구와 살 집도 돈이 마련되는 대로 바로 구할 수 있다. 지훈과 여자 친구는 그동안 힘들었던 걸 털어내려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렸을 즈음 뜬금없이 아버지에게 전화가 온다. 그 때부터 다시 지훈의 갈등이 시작된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할 때 뺨을 때리고, 돈 달라고 할 때 술만 드시며 대답을 하지 않던 아버지다. 그래도 엄한 아버지의 뜻을 지훈은 거스르지 않는다. 결국 여자 친구를 두고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전화벨이 한 번 더 울린다. 친구의 전화다. 그에게서 지훈은 여자 친구와 살 집을 계약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온갖 분노를 쌓아 집에 와 보니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있다. 아버지는 묵묵히 지훈을 기다리고 계셨다 밥 한 번 먹고 싶어 불렀다는 말을 꺼냈다. 고작 이것 때문에 불렀냐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난 지훈, 아버지에게 그동안 쌓아온 이야기를 다 뱉어(던져)버린다.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식탁에 주먹질을 하는 것만으로 대화를 대신한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던져버리지만 지훈은 마음이 편치 않다.


 

아버지와 지훈의 대화는 클리셰에 가까울 만큼 상투적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힘들어도 단칸방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사시냐고 반문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을 아끼고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서 단막극의 특징이 드러난다. 아주 익숙한 대화의 연장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사를 단막극은 쉴 새 없이 배치했다. 뻔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아버지와 한바탕을 끝내고 난 지훈은 더 깊은 위기에 빠진다. 휴일에도 회사에 나가서 고기봉의 계약을 따기 위해 자료를 준비한다. 그날따라 많이 오던 가족의 연락도 받지 않는다. 계약이 끝나면 사과하겠다는 마음으로 더욱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 지훈은 팔을 다치고 병원에 가던 길에 고기봉에게 전화를 받는다. 지금 당장 만나자는 그의 말, 병원입구를 나서는데 택시에서 내리는 동생을 마주친다. 아버지의 암이 재발했다며 우는 동생이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에게 갈 수 없었다. 고기봉에게 가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싸운 이후로 아직도 바다에 있다는 그녀는 외롭다며 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 모든 갈등이 폭발하는 중에도 그는 고기봉에게 간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참고 고기봉에게 설명을 하다 지훈은 깨닫는다. 노후를 준비하며 여든여덟까지 살고 싶다는 부자 고기봉을 보면서 예순에 가족을 떠날지도 모를 아버지를 떠올린다. 지훈의 눈물이 터지고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가 조용히 배경음으로 흐른다. 지훈은 펑펑 울면서 고기봉에게 묻는다. “얼마나 더 아프고 얼마나 더 잃어버려야 저도 어른이 될 수 있어요?”

 

후반부 10분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그에게 어머니는 나긋이 말을 건넨다. 여자 친구와의 살집을 여전히 구할 수 있는 것이냐고,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으로 생길 보험금으로 아들 집을 계약하라 말했다고 말이다. 노래 ‘가시나무’가 장면의 배경으로 흐른다. 이어진 장면에서 지훈은 자신의 비난과 타박만 저장된 아버지의 핸드폰 문자 목록을 보며 뒤늦게 아버지에게 소주 한 잔 하자는 문자를 보낸다.

드라마의 마지막을 보면서 영화 <국제시장>이 떠올랐다. 마치 우리를 울 수밖에 없게 한 덕수의 이야기와 이 드라마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20대에겐 할아버지)세대의 이야기를 지금 20대의 세상에서 만든다면 <82년생 지훈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치이며 살다 지켜야할 것을 놓치고 뒤늦게 눈물짓는 이야기는 모든 세대에서 통하는 듯하다.


 

내가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그 때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고 소중한 걸 놓치며 후회하기도 하는 서른의 모습을 보며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나는 이십대 중후반이 되었다. 지금 다시 본 <82년생 지훈이>는 나에게 더 슬프게 다가왔다. 서른이 더 가까워진 이십대를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들을 나도 모르게, 때로는 알면서도 놓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그럴 일이 많다는 것도 슬픈 사실이었다. 드라마의 말미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고, 이례적인 사례로 취업에 성공하고 삶을 살아가는 지훈이를 보면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위기를 넘기고 되찾은 그의 행복한 표정도 드라마라는 이름의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다. 단막극 82년생 지훈이가 서른을 맞이할 때보다 86년생 지훈이가 서른을 맞이하는 지금이 더 퍽퍽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심지어 다니던 직장을 잃는 것에서 드라마가 멈춘다 해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글을 퍽퍽한 현실에서 멈추고 싶지 않다. <82년생 지훈이>가 지훈이의 새로운 일상을 보여주고, 드라마 <미생>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영업3팀의 이야기를 보여준 것은, 드라마가 존재하는 이유가 판타지를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 글도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만큼 판타지를 지향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판타지를 바라며 우리는 살아간다. 대책 없는 희망이라도 좋다. 어쨌든 2015년 새해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사진 제공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