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기억의 고독, 고독의 기억 <경주>

* 보기에 따라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너, 괜찮냐?”

경주행은 그렇게 비뚠 핀잔 이후였다. 7년 전의 기억이다. 그저 그런 기억들이 춘원(곽자형 분)과의 회포를 뒤로 한 경주행의 모든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경주란 기억의 도시이다. 경주에는 그들이자 찻집이자 춘화가 있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이 경주 자체였다. 경주야말로 기억이었다. 경주에 간 최현(박해일 분)은 마땅히 기억을 붙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묘하게도 기억은 항상 어긋나고야 만다. 경주에서 헤집은 기억들은 어떤 사실도 말해주지 못한다. 돌다리를 가로질렀던 물은 메마르고, 여정(윤진서 분)은 진즉 애를 지웠다. 윤희(신민아 분)는 사실 7년 전에 최현들을 대했었고, 불쾌함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어긋나버린 기억을 마주하여 경주는, 혹은 거기에 서 있는 최현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 전에, 최현의 기억은 왜 그렇게 강렬하고 끈질긴가? 달리 말해, 괜찮지 않아 보였던 경주행이 멈출 줄 모르는 건 무엇 때문인가? 경주에서 최현은 낯선 윤희를 두 번 찾아가고, 곁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는 윤희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 그러니까 춘화를 묻는다. “저도 왜 그렇게 궁금한 진 잘 모르겠는데 그때 이후로 가끔 그 그림이 자꾸 생각나더라구요.” 의미심장한 고백 뒤에 이러쿵저러쿵 덧대지만, 뒷말들은 흐릿하고 공허하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 고백으로. ‘왠지 모르지만’ 자꾸 생각이 난다는 것. 기억 속 모든 문맥 밖에 있었지만, 그 어떤 문맥 속 대상들보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것으로.

‘그 후 오늘 이 순간까지 거의 십 년 동안 나는 몇 번 그 섬 그늘의, 얼굴도 모르는 그를 머릿속에 떠올렸던가.’ 구니키다 돗포의 이 문장은 최현의 고백과 닮아있다. 소설 속 인물 오쓰의 구별법을 일반화하면, 기억 속의 존재들은 ‘잊을 수 없는 것’과 ‘잊어서는 안 될 것들’로 구별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구니키다의 이 소설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풍경의 발견’을 보았다. 소설 속에서 형상화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풍경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잊을 수 없는 사람’이란 인간이나 주체(이자 객체)가 아닌 자연이자 실체라고. 그들은 주체들을 둘러싼, 모든 관계를 벗어나 있던 풍경의 일종이었다고. 더 나아가, 가라타니는 이러한 ‘풍경의 발견’은 역설적으로 고독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눈앞의 타자에 대해 냉담할 때야말로 오히려 자신과 무관한 대상들과의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인 것이다. 고독에 허우적대는 이가 관계를 벗어나 있던 존재들, 문맥의 외부에서 자적하던 존재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경주행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최현의 그 지독한 고독과 기억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 창희 형(김학선 분)의 죽음, 아내와 다툼, 화해하지 않고 오른 귀국길, 여정과의 짧은 만남과 자식(이었을 존재)의 부고. ‘잊어서는 안 될 존재들’ 사이에서 고독감이 깊어질수록 최현은 ‘잊을 수 없는 것들’을 북받치듯 떠올렸을 것이다. 7년 전 경주, 그 찻집을 둘러싼 공기, 은은하게 퍼지는 향, 차를 받아내는 잔의 소리, 춘화가 덩그러니 붙어있던 하얀 벽, 그리고 윤희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그런데 기억의 도착지 경주와 경주라는 기억은 꽤나 멀리 있다. 경주와, 그 위에 서 있는 최현. 오묘한 긴장과 비틀림은 왜 경주가 아닌 최현에서 오는 걸까. 말하자면, 왜 경주라는 기억의 어긋남이 최현의 자리를 흔들고 있는 듯 보이는 걸까. 최현은 왜 또, 경주에서까지 혼자인 것일까.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발자국을 발견하고 환호한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구나! 하지만 다음 날, 발자국은 말끔히 사라진다. 그런데 기억의 어긋남에 대한 의문은 발자국이나 해변의 바닷물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한다. ‘누가 발자국을 지워버린 걸까?’ 혹은 ‘발자국이 물에 씻긴 걸까?’가 아니라 ‘내가 헛것을 봤구나.’라고. 기억의 어긋남의 원인은 오로지 그에게 있다. 아무런 타자 없이 그는 오롯이 흔들린다. 자신의 기억을 보증할 그 어떤 타자도 없는 한, 말하자면 꼭 그만큼 고독한 한, 그에게 희미한 기억은 날조된 환상에 불과하다.

경주에서마저 최현은 고독하다. 스크린 밖을 모르는 우리에게 최현은 차라리 경주에서야말로 혼자다. 여정이 들어갔던 점집에는 웬 젊은 여자가 앉는다. 여정을 불렀던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단다. 최현은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침을 삼키고 눈을 돌리다가 황망히 나간다. 이미 최현의 의심은 자기를 향해있다. 여정은 어제 경주를 떠났고 그는 도무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는 돌다리로 향한다. 분명히 물소리를 들었다는 돌다리. 하지만 메말라 있는 돌다리로. 거기서 최현을 물소리를 듣는다. 지각과 사고의 구별이 흐트러진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는 가만히 물소리나 듣고 있을 순 없다. 황급히 물을 찾아 달린다. 메마른 땅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보고야 만다. 키보다 높게 자란 풀들 사이 어렴풋이 보이는 최현의 등을 보고 나는 이렇게 물어본다.


“너, 괜찮은 거냐?”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