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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디스오더>는 불도저같다. 뚜렷한 의도를 견지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간다. ‘정상이란 무엇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등 정상성을 둘러싼 질문들이 영화 곳곳에서 은연중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너무 고리타분한 게 아닌가. 문학·영화·미술·음악 등 비스무리한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은 이미 곳곳에 너무 많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내추럴 디스오더>에는 ‘이 영화가 아니면 성취해내지 못했을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추럴 디스오더>가 이토록 빛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응시-시선’의 뫼비우스띠적 구조와 야코브 노셀의 ‘非시선(시선의 불가능성)’ 속에서 드러나는 중층성 덕이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이런 ‘상찬’에 감독 크리스티안 쇤더비 옙센이 끼어들 지점은 거의 없다는 말도 된다. 그의 개입은 오히려 영화의 가치를 끌어내릴 뿐이다. 



1. 영화의 중층성 - 옙센과 야코브의 시선교환, 혹은 뫼비우스띠 


본격적인 영화 얘기를 하기에 앞서 기존 작품들이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해온 방법을 떠올려보자. 


어떤 장르, 플롯, 발화방식을 취하든 대다수의 작품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리키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테면 "응, 다변증, 쓸데없이 잔소리 많은 것두 다아 정신병이라우"라는 자기인식을 통해 ‘도대체 누가 정신병자인가’를 묻는 구보씨(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그런데 이런 방법론에는 ‘시선/발화의 비대칭성’쯤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결정적 한계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응, 그래. 나도 사실 비정상이야”라고 말하는 ‘정상인’의 발화행위는 정상-비정상의 경계를 뚫고 지나가는가. 다만 경계의 두터운 벽 앞에서 무기력하게 되돌아와 그저 메아리로 사그라질 뿐인 건 아닌가.  


그러니까 정상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정상인의 시선으로 비정상인과 그 경계를 응시하려는 시도는 자칫 성공한 듯 보일 순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성의 영역 안에서 꿈꾸는 ‘환상’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는 단 한 번도 정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딜레마는 앞서 모든 작품들의 시도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기력한 계보 와중에 <내추럴 디스오더>에서 드러나는 정상성의 시선, 즉 카메라는 어떠한가. 


<내추럴 디스오더>의 카메라는 감독의 시선으로서 ‘비정상’ 야코브와 수많은 ‘정상’들을 담는다. 그러나 여기서 야코브는 단순히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영화는 비정상, 즉 야코브의 시선을 끈질기게 좇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야코브라는 피사체를 일방적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주체로서 야코브의 시선을 응시한다. 


여기에 정상으로서 감독,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을 응시하는 야코브의 응시까지 더하면 이 둘의 미묘한 눈맞춤은 더 복잡한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곧, 말하자면 응시와 시선의 기묘한 운동에까지 이른다. 


야코브의 시선을 응시하는 카메라와, 카메라의 시선을 응시하는 야코브. 달리 말해, 정상을 바라보는 비정상을 바라보는 정상과, 비정상을 바라보는 정상을 바라보는 비정상. 


<내추럴 디스오더>는 비유컨대 이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앞이 곧 뒤고, 뒤가 곧 앞인 이런 ‘뫼비우스띠’적 자장 속에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라면 ‘나의 응시’와 ‘너의 응시’는 하나로 뒤섞이며 더 나아가 너와 나의 구분도 사라지고 나라는 주체와 너라는 객체는 곧 나라는 객체와 너라는 주체가 된다. 


이는 ‘주체와 객체의 혼종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한데, 이런 뒤섞임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 또한 그 고유의 영역을 상실하게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정리하면 <내추럴 디스오더>는 기본적으로 그 밑바탕에서 야코브라는 주체를 인식하고 이를 객체화하는 구조적 틀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 주체와 객체, 즉 이분법적 틀을 해체하고 있다. 


(다음편에 계속)



by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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