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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비명과 아우성, 침묵, 그리고 몸짓


* 연극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 리뷰입니다. 


말보다 몸짓이 앞선다. 극이 시작되자 광대는 마치 벌레처럼 슬금슬금 기어 나와 선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말을 채 이루기도 전에 흩뿌려진다. 비로소 들어선 말이라고 하는 것은 몸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말이면서도 즉흥적인 음악이나 무용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말은 비명이 되기도 하고, 어느새 메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아우성으로 시끄럽다가 이내 완전한 침묵에 다다른다. 말이 멎은 뒤에도 숨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몸은 쓰러져서도 숨을 쉰다. 그렇게 몸짓은 말보다 길기도 하다. 




말에 대해 말하자면



그럴듯한 서사도 없어 연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춤, 음악, 노래, 연극 등이 섞인 종합예술에 가까운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에서 말은 말이었다가, 미처 말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언어, 대사는 극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언어, 춤, 음악, 노래는 서로 강약고저를 넘나들며 맞물리고, 어떨 땐 다른 요소의 강조를 위해 자연스레 자리를 내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것들과 달리 유독 언어는 주눅 들어 있다. 노래와 음악은 자연스레 서로의 공백을 보완하고, 춤의 공백은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 속에서 그 격정을 은은히 이어간다. 하지만 언어는, 말과 대사의 공백은 어떠한가. 말은 순순히 춤에, 노래에, 음악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가.  


말은 주저한다.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채 터져 나오기 전에, 바로 그 직전에 차단당한다. 차단된 말은 발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발화돼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말은 말이 되지 못해 서글프다. 말의 빈자리는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럽다. 말은 애초에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억압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말은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기능하게 된다. 태초에 억압으로부터 ‘‘단번에’ 탄생했’던 말은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되지 못한다. 말의 부재는 부재 그 자체로서 관객들에게 쏟아진다. 말이 멎는 순간 무대는 말의 부재로 가득 차게 된다. 부재를 메우려는 시도들은 단지 채우지 못한 부재의 잉여를 지시할 뿐이다. 어긋난 말들, 말하자면 비명이, 아우성이, 침묵이, 혹은 몸짓들이 그렇다. 말은 어떤 식으로 억압되(지 못하)는가. 



1. 비명/아우성: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말들 


구멍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혜공의 사지를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아!”. 비명은 혜공을 고통스럽게 한 원인, 즉 구멍 속에서 나온 목소리지만 동시에 비명은 혜공이 스스로 내지른 소리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웠다. 발기발기 찢겨진 살갗 하나하나마다 고통으로 가득했다.” 우주의 거대한 자궁 속 혜공은 원인모를 비명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비명을 내지른다. 왜 하필 비명이며, 둘의 비명이 난데없이 섞이는 건 또 무엇인가. 그가 서 있는 우주의 구멍은 말하자면 어머니의 공간이자, 모성적 초자아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상상계의 공간. 언어의 분절 이전, 그러니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전의 ‘전언어적 향유를 구현하는 여자(the Woman)의 공간’. 거기서 주체는 곧 객체이며, 나는 곧 엄마이고, 또한 “나는 이 거대한 구멍 가운데 한 점이다.” 


우주의 구멍. 그곳에서 모든 소리는 비언어적으로, 말하자면 비명으로 발산된다. 분절되기 이전이라 차이를 모르는 소리. 그래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소리. 외부에서부터 들려오는 외설적인 비명들을 혜공은 곧 체화한다. 그에게 비명의 소리는 다름이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의 부르짖음이다. 비명은 “악!”이라는 말만으로 온전히 표기될 수 없다. 비명은 언어적 차원에서의 간편한 모방이 아니다. 단지 구멍 끝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소리로 내뱉는 게 아니다. 그런 행위는 언어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가 내지른 건, 차라리 몸짓이었다. 그에게 비명은 말이 아니라 음파로서, 말하자면 물리적 실체로서 침입해 들어왔다. 그건 말하자면 최초의 폭력이었다. 무지막지한 최초의 고통이었다. 비명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왔을 것이다.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감히 어떠한 언어도 (나름의 기호체계로 표기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 포획할 수 없는 소리.  


아우성도 방향은 다르지만 마찬가지다. 세 번째 꼭지에서 방언 터지듯 독백하는 광대들. 한 명의 독백에 오버랩 되는 다른 광대의 독백. 거기에 참지 못하고 덧붙여지는 또 다른 광대의 독백... 점차 커지는 목소리들. 서로 자기의 얘기를 전달하기 위해 점점 크게, 더 크게, 남들보다 더 크게...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아무런 메시지도 들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들리는 건 하나의 비명이 되어버린 여럿의 말들. 여기서 비명은 앞의 비명과 의미가 좀 다르다. 앞선 비명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비명이었지만, 여기서 비명은 언어화 된 이후의 비명이다. 다시, 라캉 식으로는 ‘실재계’. 언어가 억압했던 불가능한 욕망이 회귀하는 찰나. 거세된 욕망,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왜곡되고 비틀린 회귀. 언어의 메시지로부터 시작해서 불현 듯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메시지가 사라지는 순간. 말들의 동시적인 발화, 서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발악적으로 지르는 소리들과, 그 소리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마치 비명처럼 들리는 말들. 그러다 더이상 감정이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저버렸을 때 불연 듯 비명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침묵이 된다. ‘완벽한 침묵’.   


2. 침묵: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보이는 것으로


말이 완전히 멎는 지점. 심지어 모든 소리조차 멎는 지점. 그곳에서 말은 깔끔히 사라지는가. 발화되지 않는 말들은 순순히 자신의 부재를 드러내는가. 그 전에, ‘완벽한 침묵’은 무엇이고, 여기서 왜 말은 억압되는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예컨대, ‘세월’과 함께 가라앉은 사람들. 도망친 선장과 배 주변을 빙빙 돌던 해경. 눈물을 흘리는 대통령 혹은 유가족들. 어머니에게 죽은 아이, 아이를 죽인 어머니. 찢기고 더러워져 무덤처럼 쌓인 인형들  최초의 성, “남자의 살갗이 여자의 살갗에 닿았을 때 생겨나는 불꽃”, 몸, 속살, 섹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자신이 구축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벗어난 비논리적인 영역의 존재와 설명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그는 스스로 완벽한 언어의 논리적 체계를 구성하여 참된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논리를 벗어난 영역―예컨대 예술―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도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일반화하면 어떤 영역을 벗어난 다른 영역에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타자에 대해 자기의 가치관, 기준을 덧씌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놔두는 것. 월권하지 않는 것.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하는가. 나는 그저 ‘세월’을, 아이를 죽인 어머니를, 성을 함구해야 하는가. 내가 모르는 것들은 모르는 대로 그렇게 끝내야 하는가. 그렇다면 말은 정말로 그렇게 쉽게 사그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며, 침묵은 무지의 다른 표현일 뿐인가. 스피박의 말대로 “하위계층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 앞에서, 그들을 재현하려는 시도들은 무조건 폭력적인 것인가.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에서 침묵, 그러니까 말의 외부는 텅 빈 공백이 아니라 비논리로 가득 들어찬 영역이었다. 말함(sagen)이 멎은 이후의 침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보임(zeigen)의 시작점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개념은 말하고 은유는 보여준다. 논리적 영역이 불가능한 곳에서의 침묵은 그 자체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은유적 영역에서의 적극적 활동인 것이다. 그러니까 침묵은 결코 소극적인 주저함이 아니다.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회피적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침묵은 적극적인 보임이다.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갑작스러운 침묵은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말로부터 광대의 입을, 관객의 귀를 놓아준다. 말에서 자유로워진 광대들은 입을 닫고 본격적으로 비언어적 기호들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귀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아우성의 폭력에서 벗어나 새롭게 광대들을 본다. 말을 잃은 말은 그 자체로 보임이 된다. 말은 이제 몸짓으로 바뀐다. 



3. 몸짓: 말이 멈춘 곳


“내가 내 몸인가? 내 몸이 나인가?” 혜숙의 물음 이후 대사 몇 마디 없이 이어지는 몸짓들. 앞의 관객들에게 하나씩 나와 옷을 들추며 몸을 보여주다 아예 옷을 벗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광대들. 신체, 몸이 부각된다. 그들의 춤은 리듬을 타면서도 과잉을 떠안고 있으며 군무를 추듯 일사불란하지만 각자의 몸짓에는 규율을 벗어나는 지나침이 있다. 차라리 그들의 같은 몸짓들은 우연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몸짓은 혜숙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들의 몸짓은 ‘내 몸이 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로 형성된 질문에 대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대답.


최후에 남은 건 몸 그 자체다. 힘겨운 숨소리, 땀이 타고 흐르는 뜨거운 열기, 그리고 버겁게 오르내리는 광대들의 가슴팍. 그건 ‘몸’이라는 이름이 붙기 이전의 (몸) 덩어리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기괴한 작품들, 그리고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그러니까 ‘얼굴을 해체하여 그 밑에 숨겨진 머리가 솟아나도록 하거나 다시 찾는’ 작업. 인간을 피사체로 한 그림이지만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별되지 않은데, 그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태적인 상응 대신에, (중략)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신체가 동물의 몸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애초에 사람과 동물의 구분 이전의 상태, 말하자면 사람 혹은 동물이라는 명명행위 이전의 상태로서의 고기 덩어리. 기능에 따라 팔, 얼굴, 다리, 가슴 등으로 구분된 신체가 아닌, ‘살이나 고기로서의 신체’, 라캉식으로 말하면 전언어적 상태, 상상계, 혹은 다시, 비명. 


이런 식으로 구현된 몸짓은 그 자체로 몸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건 인간의 몸짓라고하기에는 불쾌한 과잉이며 동물의 몸짓이라고도 한정지을 수 없는, 말하자면 되기-(being)의 몸짓이다. 에너지, 기(氣)의 종잡을 수 없는 흐름만이 있는 상태. 어떠한 금기도 선언되기 이전의, 욕망의 무한하고 긍정적인(positive) 발산만이 있는 상태. 그러한 상황에서는 정말로 내가 몸이 아니라 몸이 나가 아닐까. 라캉의 말을 좀 바꿔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몸이 존재하고, 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몸을 인식하는 순간 몸의 물질성, 덩어리로서 몸은 사라진다. 이후로 ‘몸’이라는 대상은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물질성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말이 멈추는 곳, 그 이후여야만 할 테다. 말의 정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 자체로부터 발산하는 몸짓들. 그건 아마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과도 같은 순간이 아닐까.   


by 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