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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사는 게 숨이 차요.”, <거인>의 화법

*보기에 따라 약간의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태용 감독의 첫 장편 영화 <거인>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실상 부모가 부재한 영재(최우식 분)의 지독한 성장기다. 영화는 계속해서 영재의 비극적인 행보를 아슬아슬하게 따라다닌다. 집에서 뛰쳐나온 영재는 보호원(이삭의 집)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받는다. 거기서 영재는 신부가 되겠다는 가녀린 희망 하나로 아등바등 삶을 버텨낸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말하자면 영재는 불쌍한 아이다. 영화 초반. 사건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 그러니까 영재가 놓인 생활환경부터 안타깝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영재는 더욱 더 불쌍해진다.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재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다. 여기까지는 영화에서 명확하게 부각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영화의 핵심, 말하자면 영화가 진정으로 보이는 방식은 다른 데 있다고 보았다. <거인>은 영화의 언어보다는, 영화가 말하는 방식, 영화의 화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만 이 영화만의 비의(悲意)적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일환으로 나는 영화를 처음 본 뒤, 그리고 두 번째로 보기 전에 영재의 '죄책감'을 염두에 두었다. 이런 의문과 함께. '불쌍한' 영재가 부각되는 과정에서 영재의 '죄'란, 죄책감이란 무엇인가? 감독은 한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영재에게,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의 동정과 연민에 제동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인>은 같은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가?

  영재의 죄책감이 극대화 되는 것은 같은 처지인 범태(신재하 분)와의 관계에서이다. 물론 애초에 영재의 '죄'는 이삭의 집에서 신발을 훔쳐다 학교에서 판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영재의 죄책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영재는 별 다른 거리낌 없이 죄를 짓는다. 그건 이삭의 집 원장부부에 대한 영화의 시선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원장부부는 악인이 아니다. 그네들은 (그것이 위선이더라도) 분명히 아이들을 위한다. 그런데도 카메라는 집요하게 이삭의 집을 찾아온 손님들을 대할 때와 아이들을 대할 때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들의 표정을 잡는다. 그러한 씬들에선 범태의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반항과 욕설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영재는 범태처럼 그네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영재가 이삭의 집을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은 그곳이 좋아서라기보단, 거길 떠나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영재의 반감은 말하자면 상쇄되고 억눌리는 것이리라. 영화 초반에서 죄는 드러나지만, 죄책감이 좀처럼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범태에게 씌워진 '운동화 도둑'이라는 누명을 해명하지 않은 뒤, 영재는 살짝 불안해 한다. 하지만 죄책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죄책감은 터질 듯이 폭발한다. 왜 죄책감은 뒤늦게 터져 나올까? 성당에서 영재는 우연히 범태와 마주한다. 이 씬은 좀 뜬금 없다. 어떻게 보면 영화의 옥에 티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하다. 개연성의 부족, 데우스 엑스 마키나? 나는 차라리 거기서 영재가 범태의 환영을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감독이 이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걸 감수하면서까지 저 둘의 마주침을 집어 넣었을까? 그건 범태에 대한 영재의 죄책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로 이어서, 다른 질문. 그렇지만 그 씬을 하필 거기 집어넣었어야 했는가? 영화 앞 부분에 위치시켰더라면 충분히 개연성을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는 아마도 감정의 흐름을 고려한 영화 전체의 구조적 배치의 결과이겠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 씬이 영재가 좇아왔던 모든 것을 한 순간 잃게 되는 시점에 등장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모든 것을 잃고, 놓아버리자 북받치듯 죄책감이 밀려온다는 것.

  그걸 나는 이 영화만의 화법으로 받아들였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기. 아니, 같은 얘기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다른 얘기를 건네기. 불쌍한 (사실상) 고아의 이야기. 있음 직한 이야기를 <거인>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가. 한 번 이런 가정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만약 성당 씬이 없었다면 영재는? 좌절, 또 좌절.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휩쓸리는 불쌍한 아이. 그렇다면 저 성당 씬의 삽입 이후의 영재는? 위에서 말했듯 죄책감은 영재가 무기력하게 쓰러진 이후에, 즉 성당 씬에서 터져 나온다. 거기서의 울음은 앞선 울음과 다르다. 비유컨대, 앞선 울음이 길 한복판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의 울음이었다면, 성당에서의 울음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앞선 울음과 달리, 후자는 최소한 그 대상이 뚜렷하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면, 그 어디로도 가면 안 된다. 누군가 말을 걸 때까지, 혹은 엄마가 나를 찾을 때까지. 하지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일단 발걸음부터 떼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길을 물어가며, 언젠가 집이 나올 때까지.

  나는 성당 씬에서 영재가 살아나갈 모습을 어렴풋이 본 셈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영재의 앞날이 희망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희망적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니까. 오히려 나는 성당 씬 이후로 영화 이후 영재의 삶에 대해 더욱 비관적이게 됐다. "사는 게 숨이 차요."라는 영화의 카피. 숨이 차는 건 숨이 멎는 것과 다르다. 그러니까 숨이 차다는 건 공기가 없다거나 목이 졸려 죽고 있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최소한의 공기로 살아간다는 것이리라. 숨이 멎을 것 같다가도 결코 멎지 않는 순간들의 연속. 숨이 끊길 듯 끊길 듯 끊이지 않는 고통의 반복. 혹은 '정체 상태'.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리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