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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암살>, 오락물과 시대극의 만남이란

아니나 다를까, <암살>에 대해서도 수많은 상업적 걱정과 염려가 앞섰다. 심지어 어떤 기사에서는 지금까지 ‘일제시대’를 다룬 영화들의 저조한 흥행실적을 일일이 나열하며, 최동훈의 ‘천만’ 기록에 혹여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물론 상업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범죄의 재구성>(2004), <타짜>(2006), <전우치>(2009), 그리고 <도둑들>(2012)의 최동훈과 시대극의 만남이 어떻게 펼쳐질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점은 있었다. 굉장히 개성적인 캐릭터들, 자극적이고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 이를테면 지금까지 최동훈의 영화는 철저히 만화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오락물에 가까웠다.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와 그의 영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동훈은 오로지 캐릭터와 이야기만으로 영화를 유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최동훈이 10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 그렇기 때문에 ‘팩트’와 ‘거짓’의 윤리적, 고증적 가름이 비교적 명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에 나는 자못 놀랐다. 그의 만화적, 오락적 상상력이 ‘팩트’와 ‘거짓’이라는 잣대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혹시 둘 다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더구나 일제 강점기는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수많은 논란이 거듭되며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도 많지 않은가. <암살> 개봉 소식에 앞서 내가 품은 걱정라고 할 만한 것들은 이 정도였다.

 

1.

 

그러니까 나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최동훈 특유의 오락적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암살>을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암살>은 역시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겉에 둘렀을 뿐, 기본적으로는 그가 지금껏 표현해왔던 ‘오락물’에 가까웠다.

 

안옥균(전지현), 염석진(이정재),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영감(오달수) 등 모든 캐릭터들은 굉장히 강한 개성을 내뿜는다. 그런데 여기서 개성이란 각 인물들의 실존적인 차원, 예컨대 성격이라든지 트라우마, 혹은 불안 따위에서 오는 게 아니다. 최동훈 영화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재미있게도 각 인물들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은 그들 밖에 있는 ‘물질’이다.

 

예컨대 안옥균을 생각하면 먼저 동그란 안경이 떠오른다. 한쪽 알에 금이 간 자국은 여전히 선명하다. 염석진은 어떤가. 탈모의 전조인지는 모르나 ‘올백’ 스타일 덕에 훤히 드러난 넓은 이마가 떠오르며, 그 전에 잃어버린 손가락를 대신하는 가짜 손가락이 연상되지 않는가. 특히 이 가짜 손가락은 의미심장하다. 염석진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스쳐가는 것이 그의 신체를 대신한 물질이라는 것. 그의 존재를 일부 도려낸 자리에 들어찬 ‘이물질’이 외려 그를 표상한다는 것. 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도(예컨대 objet a, 상징적 거세) 의미 있을 것이다. 하와이 피스톨의 장교 외투, 중절모도 그렇고, 영감의 말아 올라간 수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월터 살레스, 2004) 혹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립>(빔 벤더스, 1999)이 떠올라 반가웠던 ‘모터사이클’이 그렇다.

 

거기다 이야기 구조도 탄탄하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게 될 반전을 위한 복선들을 마련해놓는 방식이나, ‘암살’이라는 소재 하나만 가지고도 저렇게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한 곳에 끌어들이는 풍부함은 ‘역시 최동훈’이다. 거기다 두 시간이 넘는 런닝타임 동안 끊임없이 사건들을 터뜨리며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는 테크닉이나, 사건들 간의 긴밀한 연관관계에선 ‘이야기꾼’ 최동훈의 매력이 극대화된다.

 

반면에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는 뒤편으로 물러난다. 일종의 풍선효과랄까. 강렬한 캐릭터들과 플롯 뒤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식민지 조선, 그리고 해방 후 조선이라는 시·공간은 그저 주어진 어떤 것일 따름이었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라는 배경은 ‘암살’이라는 소재를 편리하게 적용하고, 관객들을 적극적인 위치에 놓기 위한(일제 강점기와 총독 암살이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 놓이며, 유사한 감정을 품는다.) 수단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판타지’ 웨스턴이라 부르고 싶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김지운, 2008)과 <암살>은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최동훈의 이전 작품들과의 유사성은 말할 것도 없고. 관람객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전지현 예쁘다.’, ‘연기들 잘 한다.’ 정도다. 결국 최동훈은 자신의 오락적 스타일과 시대극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전자에 무기를 실은 것처럼 보인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

 

하지만 최동훈도 마냥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의 강렬함을 외면하진 않았다. 차라리, 그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 둘 사이를 좁히고자 고군분투한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감독이 남겨둔 단서를 살피기 이전에,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게 있다. <암살>의 여러 캐릭터 중에 한 명만 꼽으라면? 다양한 대답이 예상되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염석진을 고를 것이다. 사실 염석진은 주된 캐릭터 중에 유일한 악역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캐릭터들과 비교해 비중이 유별나게 무거운 편도 아니다. 오히려 보이쉬한 매력의 안옥균이나, ‘츤데레’ 하와이 피스톨과 비교했을 때, 염석진은 시종일관 냉혈한으로서 전형적인 스파이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염석진에 주목한 이유는, 캐릭터나 이야기의 차원에서가 아니다. 영화의 구성방식, 구조를 살펴보자. <암살>에서는 시간이 뒤죽박죽 편집되어있다. 우선 염석진이 스파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 총독 암살을 실패하고 도주하다 잡히기까지의 시간. 편의상 이 시간을 ‘대과거’라고 하자. 그리고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는 시간, 즉 안옥균을 필두로 한 암살단원이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이 있다. 이를 ‘과거’라고 하자. 마지막으로 해방 후 반민특위의 주도하에 염석진이 재판장에 올라간 시간이 있다. 이는 ‘현재’라고 하자.

 

영화의 시간 배치를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대과거 – 현재 – 과거 – 현재’. 첫 번째 ‘현재’ 씬은 매우 짧아서 자칫 놓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첫 번째의 ‘현재’씬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왜 감독이 ‘과거’를 ‘현재’ 사이에 위치시켰는지 이해해야 한다. ‘현재’는 염석진의 재판이 이뤄지는 시점이다. 첫 번째 ‘현재’는 자기가 임시정부에 스파이로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꼽추(정규수)의 증언과 함께 ‘과거’로 넘어간다. 말하자면 ‘과거’란 어쩌면 송두리째 꼽추의 회상에 근거한 플래시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에서 꼽추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길고 긴 ‘과거’에서 다시 돌아온 두 번째 ‘현재’ 시퀀스에서 염석진의 재판에 꼽추는 ‘증인’ 신분으로 와 있다. 하지만 검사가 증인을 부르러 갔을 때 이미 꼽추는 칼에 맞아 죽어있다. 여기서 두 번째 ‘현재’에서 꼽추가 죽은 시점과 ‘과거’의 전개가 끝나는 시점이 유사할 거란 짐작을 할 수 있는데, 이는 ‘과거’가 ‘현재’ 꼽추의 회상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염석진의 반민족 행위를 증언하기 위해 재판정에 참석한 꼽추는 누구의 짓인지 증인으로 출석하기 직전에 칼에 맞아 죽는다. 그렇게 꼽추의 증언은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그의 증언이 그가 증언하기 이전에 이미 증언되는 마술(조르주 멜리에스 이후로 영화란 마술의 연장선상에 있어왔다.)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던 셈이다. 꼽추가 법정에 출두해 어떤 말을 할지를. 또한 꼽추의 회상으로 이뤄진 플래시백, ‘과거’란 곧 꼽추의 증언이었고, 그것은 곧 염석진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도 말이다. 결국 ‘과거’의 시간이란 반어적으로, 염석진에게 바쳐진 헌사다.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염석진을 고를 것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더 나아가 ‘과거’를 ‘현재’ 사이에 집어넣은 것은 감독의 변명이기도 하다. 비로소 처음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최동훈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에 자기의 장기를 마음껏 드러내고자 했다. 강렬한 캐릭터들로 이뤄진 서스펜스. 하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가 만만치 않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때 ‘현재’를 둘러싼 ‘과거’라는 구조는, 더 나아가 그 과거라는 게 거짓말을 밥먹 듯 해대는 스파이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구조는 ‘과거’의 위상을 뒤흔든다. 이를테면, 견고한 ‘현재’를 전후로 ‘과거’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판타지(혹은 기억의 한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증언의 옳고 그름, 즉 ‘과거’의 시대적 진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로지 남는 것은 증언이 지시하는 대상, 곧 엽상진과 그를 둘러싼 캐릭터들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