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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브라더보다 무서운 빅데이터에 대한 경고, 한병철의 <심리정치>

한병철은 내게 낯선 비평가였다. 그가 이전에 집필한 <투명사회>, <피로사회>에 대한 호평은 익히 들었지만 접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심리정치>는 짧은 분량이었음에도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책 첫머리에서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9쪽)이라는 말이 이 책의 주제라는 걸 깨닫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자유주의의 자유,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그는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10쪽)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해야 함’과 ‘할 수 있음’의 차이다. 과거에는 해야 한다는 규율의 언어가 작동했다면 현재에는 할 수 있다는 자유의 언어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역설적으로 강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권력자나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한 강제이다.

 

한병철은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와 친구(Freund)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임을 환기한다. 즉,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13쪽)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경쟁한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우리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용자이자 노동자가 된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15쪽) 무한경쟁 속에서 공동체는 무너진다. 그 결과 고독이 발생한다.

 

과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서로 적대적인 계급들로 나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이 전제되지 않는다. 가시적인 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17쪽)

 

그리고 그 배후에는 자본이 있다. 한병철은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17쪽)이라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아도 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죄)을 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19쪽)에서 드러나듯 그는 자본을 하나의 종교로써 바라본다.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최초의 사례”라는 발터 벤야민의 통찰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들

 

한병철에 의하면 고전적 파놉티콘보다 한층 더 새롭고 효율적인 파놉티콘이 디지털 네트워크다. 그는 디지털 통제사회의 가장 큰 의존 기반으로 자발적인 자유를 꼽는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20쪽) 사람들은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자신의 내면, 비밀, 낯섦, 이질성을 없앤다.

 

가령 우리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를 개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요’를 누르는 것에 대해, 또 ‘태그’된 것에 대해 신경을 쓴다. 글을 쓰는 순간 그 내용이 공유되고 개방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한 채 우리는 글을 쓴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항상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수시로 확인하면서 남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엿보고 때때로 자신을 어필한다. 한병철은 스마트폰은 디지털 성물,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과도 같다고 비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빅데이터에 의해 낱낱이 기록되고 정리된다. “빅데이터는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25면) 이를 통해 인간은 조종 가능한 대상이 된다. 즉 인간 자체가 측정과 조종이 가능한 객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의 행동은 패턴화되고 수치화된다. 실제로 빅데이터는 정치, 광고 등의 분야에서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데이터회사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갖고 장사를 한다. 액시엄은 인간을 70개의 범주로 나누고 필요에 따라 데이터를 매매한다. 이로써 중산층에 해당하는 그룹에게는 맞춤형으로 광고, 정치 카탈로그가 제공된다.

 

그러나 빅데이터로 낱낱이 기록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오타쿠를 분석한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환경관리형 권력’을 생각해볼 만하다.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단점(예를 들어 개인 정보를 도둑맞고, 유용되고 악용되는 리스크)보다 연결되는 것의 장점(포탈로부터 서비스를 수시로 제공받는 것)이 더 크기(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디지털 사회에서의 주체성 상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조차 깨닫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통치술, 심리정치

 

푸코의 파놉티콘이 기본적으로 신체를 속박하는 생정치라 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은 심리를 속박하는 심리정치의 형태를 지닌다. 한병철은 그것의 이유로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 형식을 든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비물질적이고 비육체적인 생산 형식이다.”(41쪽) 규율사회에서처럼 인간의 육체가 더 이상 생산력의 중심적 위치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신체의 훈육은 정신의 최적화로 대체된다.”(41쪽)

 

심리정치의 대표적인 예로 그는 모티베이션과 자기계발을 든다. 미국의 유명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는 불만족, 긴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조차 다시금 힘을 만들어내는 마땅히 필요한 고통으로 인식한다. 오직 최적화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고통 또한 이용 가능한 고통으로 환치되어 버리는 것이다. 얼마 전 불었던 우리나라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열풍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심리정치의 핵심은 긍정성의 폭력에 있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규율적 강제를 행사하지 않고 긍정적 자극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것은 영혼을 ‘탈주조’하기보다 영혼이 욕망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세심하게 기록한다. 그것은 예측을 바탕으로 인간 행동에 선수를 친다. 그것은 행동을 가로막는 대신, 행동에 앞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억압하기보다는 호감을 사고 욕구를 채워주려고 애쓰는 스마트정치다.”(55쪽)

 

언뜻 보기에는 이것이 왜 위험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심리정치로 인해 제한적인 선택지를 부여받는다. 선택지에 없는 답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허용되는 것은 오직 시스템 내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삶의 내재성을 잃는다. 내재성은 어떤 다른 것에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능력이자 행복을 의미한다. 삶을 삶 자체에서 소외시키는 자본의 초월성은 삶의 내재성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이 활용하는 전략이 바로 심리정치다. 그리고 그 전략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가 빅데이터다. “신자유주의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29쪽)는 한병철의 비판은 새겨들을 만하다.

 

돌이켜보면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삶의 편리함과 편의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높아진 편리함과 편의성으로 인해 더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이끌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렵다. 기술이 삶의 질을 드높일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앞서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건 아닐까 반문해본다.

 

*사진 출처: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