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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스틸 앨리스> 아쉽지만 여운이 남는 까닭은

영화를 보는 시선은 5천만이 넘고, 나의 관점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나만의 기준을 짚고 넘어가는 게 무의미하진 않으리라. 지금 나는 동일한 영화를 바라보는 수천수만의 시선 중 하나가 아니라 나만의 글을 전개하고 설득시키기 위한 단계를 밟고 있으니까. 즉, 수천수만 대 일의 관계가 아니라, 정확히 일대일의 관계 말이다.

영화를 평가하는 나의 기준에는 여러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즉흥적인 재미, 감동도 물론이고, 서사의 전개, 몰입도, 긴장감, 연기, 음악 등. 바로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독창성’이다. 독창성이란 어떤 영화가 다른 영화와 달리 그 영화가 아니어서는 안 될 이유, 혹은 그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독창성은 다양한 층위에서 실현될 수 있다. 위에서 나열한 영화의 내용적인 요소들에서는 물론이고 카메라, 편집, 조명, 미쟝센 등 형식적인 요소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불행하게도 나는 최근 천편일률적인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서사만 봤을 때, <스틸 앨리스>에서 독창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알츠하이머 하면 떠오르는 것들, 혹은 떠오르는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과정, 그 와중에 묘사되는 섬세한 변화들. 어쩐지 불안한 병의 징후들, 그리고 점차 확산하여가는 증상들. 그 와중에서의 미묘한 갈등, 그리고 사랑.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에 대한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뻔하다. 

 

오히려 서사는 때로 지극히 극적으로 치장되어 있다. 이전 글에 쓰기도 했지만(<나이트 크롤러> 로버트 엘스윗과 제이크 질렌할 덕분에), 극적으로 완전무결한 서사는 과잉을 낳는다. 예컨대, 앨리스(줄리언 무어 분)가 굉장히 똑똑하고 현명한 ‘언어학자’였다는 설정이 그렇다. 이후 진행되는 서사는 굉장히 잘 맞아떨어진다. 누구보다 언어에 대해 천착했고,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학자가 언어를 점차 잃는다. 언어에 대한 결벽증이(영화 초반 그녀는 단어 하나가 잠깐 생각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황한다. 적절한 단어를 생각할 때까지 매번 고심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언어 장애로 이어진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영화 중간의 연설 씬이 그렇다. 앨리스가 알츠하이머 환자를 대표하여 연설하는 씬이 꽤나 길게 이어진다. 그 씬에서 앨리스는 마련된 자리에서 ‘대놓고’ 자신의 처지와 심정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는다. 이런 장치는 어떤 면에서 굉장히 용이하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 하지만 어디까지 영화의 서사 속에서 녹아나는 형태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변호인>(양우석, 2013)에서 송우석(송강호 분)의 법정 씬이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스틸 앨리스>는 구조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흠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고전적인 혹은 전근대적인 의미에서) 수학이나 과학, 철학이 아니다. 무식하게 정의하면, 투입한 양 꼭 그만큼 배출된다는 ‘열역학 제1법칙’은 진리일 것이나, 영화도 진리를 다룰 필요는 결코 없다. 차라리 영화는 현상을 다뤄야 한다. 이 말은 곧, 진리는 현상과 다르다는 것을 함축한다. 진리는 현상을 뒷받침하지만, 헤겔이 그랬듯, 진리는 현상을 통해서만 (잘못)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모든 현상의 강력한 근간이지만, 현상의 힘(영향력) 또한 그 못지않다. 오히려 더 강력하다. 지구가 이 드넓은 우주에서 먼지만도 못하게 미미하며, 지구가 사라져도 우주 전체에 큰 변화가 없으리란 것은 진리다. 하지만 그 지구가 우리 생활의 터전이고, 지구가 사라지면 나를 포함한 인류가 멸망하리란 것은 하나의 현상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이 중 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영화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우리가 직접 마주하는 일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하듯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어렵지도, 고상하지도 않다. 영화는 일상과 밀접하게, 움직이는 대상과 그 사이의 소통을 통한 시각적 자극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가. 나를 포함하여 누구나 영화에 대해 코멘트 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예술 장르─음악, 특히 클래식, 회화, 무용, 연극 등─에 대해선 침묵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둘은 달리 수용하는 현상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일상과 가까운 영화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일상은 진리와 달리 완전무결하지 않으며 흠과 결점투성이다. 어쩌다 보니 삼단 논법이 완성되었다.

 

‘영화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일상에 가깝다.’ 그런데 ‘일상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그러므로 ‘영화가 완전무결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문장이 당위가 아니라 바람(desirability)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겠다.

 

그렇다고 <스틸 앨리스>가 마냥 독창적이지도 않고 과잉된 서사로만 점철되는 것은 아니다. 서사에서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스틸 앨리스>는 다른 층위에서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가 아닌 <스틸 앨리스>여야만 하는지를 보여줬다.

 

우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앨리스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것이 그리 어렵다고 할 순 없다. 누구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시점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고, 영화에서 전개되는 양상들은 (위에서 말한 전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상상했을 법한 대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앨리스 그 자체가 되지 않았다면 못했을 감정적 울림을 표현했다. 비록 서사적으로는 과잉되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연설 씬에서의 줄리언 무어의 대사와 표정, 몸짓은 최고였다. 줄리언 무어는 단지 앨리스의 정서나 감정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를 어우르는 생애를 모조리 체화한 듯이 보였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중층적인 구조다. <스틸 앨리스>에서 시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조악한 캠코더 화질로 찍힌 일종의 대과거 씬이 있다.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영상 속 앨리스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있다. 나머지 두 부분은 영화의 전개와 더불어 자연스레 이어진다. 즉,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기 전부터 받은 후 점차 그 증상이 심해져간다. 하지만 영화는 여러 장치를 통해 두 시간을 단절시키고 반복해서 앞선 시간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상태가 악화되기 이전의 앨리스가 악화된 이후의 앨리스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가 그렇다. 거기다 영화 중간마다 위에서 말한 대과거가 삽입된다. 종합하면, 영화는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의 현재 시점이 진행되는 와중에 과거와 대과거를 삽입함으로써 세 층위의 시점을 제시한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현재의 앨리스는 얼핏 초라해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가피한 방식으로나마 영화는 앨리스의 존재를 가까스로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닐까.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