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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문오의 서사와 경아의 서사가 이토록 다른 이유

고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선 소설의 제목부터가 『별들의 고향』이며, 문오와 경아의 서사에 있어서 고향이란 비유하자면 어떤 분수령의 지점과도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단순히 고향의 있음/없음이 그 둘의 서사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하나마나 한 말이 되겠지만, 고향은 분명히 그 둘에게 존재했다. 경아에게 있어 고향은 ‘강원도 어느 시골 역’(1, 49)이었으며, 문오의 고향은 ‘바다가 보이는’ ‘부두 연변’(2, 317)의 한산한 어촌이었다. 문오의 고향과 경아의 고향 사이를 가로지르는 변별점은, 철학적인 용어를 끌어와 보면 ‘존재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에두르지 않고 말해서 문오와는 달리 경아에 관해 의문시 되는 점은 ‘경아에게 고향이 있는가?’가 아니라, ‘왜 경아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나두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2, 274)라며, 고향을 인식하지 못/안 하는가?’이다. 이러한 의문을 토대로 문오와 경아의 서사를 비교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 전에 잠시, 고향이라는 대상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향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태어난 이라면 즉, 그 누구에게라도 존재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는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인식의 측면에서는 ‘고향’을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지 않을까. 먼저 고향을 인식하는 한에서는(혹은 인식할 수 있는, 할 필요가 있는 환경/상황에서는) 고향이란 현재를 벗어난, 어떤 시점을 지칭한다. 그건 물론 과거의 시간이자, (또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미래의 시간이다. 도식적으로 표현해보면 ‘고향=과거(=미래)’ 쯤이 되겠다. 다른 경우, 즉 고향을 인식할 수 없는 경우(인식하지 않는, 혹은 인식할 수 없는 상황/환경) 고향(없음)은 그야말로 현실 그 자체로의 회귀이다. 고향이란 어딘가에는 있지만 너무 멀어, 아득하여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면. 마치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을 인식할 수 없는 이들에게 고향(없음)을 생각함이란 역설적으로 현재(현지/타향)를 생각함과 같다. 이 점에서 경아가 ‘별’을 보며 남긴 전언을 눈여겨보자. “내 고향은 멀어요, 별처럼 멀어요.”(2, 275) 고향은 아득히, 별처럼 지독히 먼데, 이건 도대체 고향이란 것이 없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러한 절망적 ‘인식’이 (되돌아) 향하는 곳은 어김없이 현실이다. 산 정상에서 마치 어떤 대상을 향하는 듯 있는 힘껏 내뱉은 외침은 대상(없음)을 빗겨간다. 결국 메아리로 돌아오는 외침을 통해서 확인하고, 인식할 수 있는 건 그 외침을 내뱉었다고 믿어지는 ‘나’뿐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틀을 가지고 섣불리 경아와 문오를 나누어보자면, 경아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요, 문오는 ’과거(=미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향(에 대한 인식)’을 축으로 둘의 서사를 비교해보겠다. 먼저 문오의 서사를 보자. 문오는 ‘현실적’이지 않은 인물이다. 이는 단순히, 생활에 무능력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문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못한다. 문오는 계속해서 ‘현실’을 빗겨간다. 제대 후 그가 ‘게을러질 수 있는 데까지 게을러지고 있었’(2, 76)던 것은, ‘자신을 잃어버’(2, 74)린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문오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일까. 엄밀하게 단정하기는 그렇지만, 또 엄밀하게 드러나지도 않지만 혜정과의 관계 등으로 비추어 봤을 때, 어떤 회의감, 허무감이 그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도대체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2, 77) 그에게 있어 현재란 어떤 잊어지고 말 것, 바로 사라져버릴 것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자 ‘개처럼’(2, 79) 짖어대다, 막상 성공하자 ‘그 이상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2, 81)던 사건이나 여성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느끼는 회의감, 허무감 등을 보면, 그는 ‘지금’의 행위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기댈 곳이란, ‘과거(=미래)’로서의 고향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에게 있어 고향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뚜렷한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고향이란 오히려 계속해서 과거(=미래)로 향하고자 하는 어떤 행위 그 자체였다고 하는 것이 엄밀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또 다른 고향을 마주한다. “언젠가 어렸을 때 이 동굴에서 하룻밤을 새웠던 적두 있었어. 이것은 말하자면 나의 진짜 고향이야.”(2, 335) 거기에다 ‘현실’로서의, 실제하는 경아가 사라질 때마다 등장하는 환영은 또 다른 고향의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요소들은 현실에 권태를 느끼는 문오가 계속해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하지만 그건 확실히 어떤 (표면적으로 현실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도) 죽음을 향하는 게임인데- 암시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사실상 큰 의미는 없다고 하더라도, ‘미래(=과거)’로서의 고향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건 “서울이 싫어졌”(2, 273)을 때면 어김없이 돌아갈 수 있었던 ‘고향’이다. 결론적으로, 문오의 서사에 있어서 현실, 현재란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어김없이 미래(=과거), 혹은 다른 의미는 아니지만 과거(=미래)에 자리를 내어주고 마는 이를테면 공백이자, 과도기적인 과정인 것이다.


경아의 서사는 어떠할까. 그 전에 경아에게 있어 ‘고향’이란 어떤 의미인가. 크게 봤을 때, 경아는 세 남성 인물들을 거쳐 간다. 각각의 남성에 대한 경아의 태도나 행위는 다르다. 특히, 영석과 만준에 비해 문오를 만났을 때,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는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각각의 경우에서 드러나는 경아의 ‘고향’에 대한 인식을 중점적으로 다뤄보겠다. 그 전, 경아와 문오가 처음 만났을 때 그들 사이의 불가사의한 동질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녀와 나는 같은 동일의 사람’(2, 139)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문오의 생각을 그 이전 두 남성 인물들에게 향해보자.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실이 그러한데), 경아가 영석과 만준을 만날 때에는 확실히 ‘고향’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향이 ‘존재론적’ 고향이 아님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석을 만날 때 경아가 향하는 ‘과거(=미래)’의 대상, 즉 현실을 언제나 빗겨나가는, 현실을 벗어나 어떤 위안 혹은 충전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가정이자 (미숙하지만, 어떤 정신적 의지처 정도에서) 종교가 아닐까. “결혼하고 싶어요, 영석 씨 당신하고. 정말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이젠 이런 생활에 지쳐버렸어요.”(1, 140), 간헐적으로 불쑥 등장하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 그리고 “그이가 저를 버리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영원히 저를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1, 103) 등.

 

다음으로 만준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가. ‘여자인 그대는 자기의 과거를 얘기해서는 아니 된다.’(1. 226)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만준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 외로움 등을 빗겨가게 해주는 ‘고향’은 그녀만의 ‘비밀’, 즉 정조의 깨어짐이 아니었을까. 고향이 긍정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나는 이미 몸이 더럽혀진 존재야.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거야. 이러한 합리화가 (아직까진) 가능한 지점에 바로 그녀의 ‘고향’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점은 그녀에게 있어 정조, 다르게 말하면 부도덕/문란함이 만준과의 ‘실질적(원만한?)’관계 이전과 이후에나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다시 말해, 경아에게 ‘비밀(정조)’의 차원이 발견되는 지점은 만준 이전, 즉 영석과의 관계에서 임신을 했던 사실에서이고, 만준 이후에 있어서는, ‘경아는 무심코 손을 뻗쳐 수표를 받았다. (...) 문득 자기가 거리의 여인처럼 주고받는, 이것이 어쩌면 몸값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2, 26-27)다는 구절에서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오와의 관계에 있어는 어떠할까. 맑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했는데, 이 점에서 확실히 문오와의 관계는 희극적이다. 그 말은, 우리의 흐름을 따라서 표현해보면 경아에겐 이젠 더 이상 ‘고향’이란 것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초반에 경아에게 느꼈던 문오의 ‘동질감’은 적잖은 비약의 양해를 구하자면, 아직까지 어느 정도 파편의 형태로나마 남아있던 고향의 이미지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있어 그나마 남아있던 고향이라는 것은 이미 무참히 깨어졌고, 그것도 한 번 더 (훨씬 비극적으로) 짓밟혀 버린 상황이었다. 고향은 존재하나, 그것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별처럼, 그녀는 더 이상 그곳을 인식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어긋남이 있는데, 표현해보자면 존재하는 고향은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고향인 것이다. 경아가 죽은 후에도 가족들은커녕 문오 외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절대자’를 상정하는, 치기어린 말투로 소망을 뇌까리는 언급도 없으며, 또한 경아의 정조 관념은 도착적으로 왜곡된다. 이 모든 건 경아의 ‘인정認定’을 바탕으로 하는 듯싶다. “난 정말 이상한 여자예요, 난 말이에요, 남자가 없으면 말이에요, 곧 죽어버릴 여자인 모양이죠? 난 그래요, 그런 여자예요.”(2, 204). “나는 애를 밸 수 없어요.” (...) “그러니까 내 몸은 병신이에요.”(2, 375) 경아가 인정하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도저히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 두 번 반복된 비극을 맛본 뒤, 경아가 취할 수 있던 건 이 냉소주의의 뉘앙스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현실을 빗겨나가는 ‘고향’ 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존재하더라도 인식될 수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있어? 하며. 결국 경아는 ‘엄마한테 돌아가’(2, 378)려 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찾을 수 있을까’(2, 378)? ‘얼굴에 미소를 짓고’(1, 31), 죽은 경아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문오의 서사와 경아의 서사를 ‘고향(=미래(=과거))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비교해보았다. 요약해보면, 문오는 계속해서 현실을 빗겨가며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 현실이란 일종의 공백에 그치며, 경아의 존재/죽음조차 또 하나의 고향 쯤이 되어버린 듯하다. 반면에 경아는 두 번의 비극 끝에 고향(엄밀히 말하면 고향에 대한 인식 능력/필요성)을 상실하였다. 벗어 나온, 혹은 돌아갈 고향의 부재란 그녀에게는 혹독한 현실 그 자체와의 대면과 맞닿아 있었다. 결국 절망 끝 그녀가 마주한 ‘최후의’, 하지만 단 한 번도 벗어나온 적 없던 고향으로 가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 사진출처: 알라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