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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위플래쉬>가 단순히 '스승-제자' 영화가 아닌 이유

놓쳐선 안 되는 건, <위플래쉬>를 제자와 선생을 다룬 영화로만 보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계속 남아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위플래쉬>는 <굿 윌 헌팅>(구스 반 산트, 1997)에서 ‘선생-제자’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달랐다. 자신의 천재성을 깨닫지 못하고 평범하지도 못한 삶을 사는 제자와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천재성을 발휘시키고자 분투하는 선생. <굿 윌 헌팅>에서 헌팅(맷 데이먼 분)과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 분)가 그랬다면, <위플래쉬>의 앤드류(마일스 텔러 분)와 플렛처(J.K. 시몬스 분)는 조금 다르다. <위플래쉬>는 차라리 제자(와 선생)의 얘기며, 단순히 한 개인(우리 중 누구인들 제자가 아니었으며, 선생을 두지 않았을까)의 이야기다.

둘의 차이를 좀 더 명확히 해보자. <굿 윌 헌팅>에서 제자와 선생은 명확히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다. 이를테면, 영화의 서사는 헌팅과 맥과이어의 긴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은 정확히 둘의 중간을 향한다. 헌팅은 맥과이어로서 존재하고, 맥과이어는 헌팅으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위플래쉬>에서도 제자와 선생이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없다. 영화의 시선은 줄곧 앤드류를 향한다. 플렛처라는 존재는 늘 앤드류라는 존재에 빚진다. 말하자면, 영화는 앤드류 없는 플렛처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앤드류가 부재한 플렛처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상상(이라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말을 둘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해, 플렛처만이 앤드류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오해해선 곤란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플렛처에게 앤드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반면에 앤드류에게 플렛처는 그 모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당연한 말이지만, <위플래쉬>는 영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좇을 수밖에 없다. 플렛처가 앤드류의 존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의 문제다. 왜냐하면, 플렛처는 앤드류를 집요하게 좇는 카메라를 통해서만이 가까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내용과 형식의 괴리. <위플래쉬>는 영화라는 매체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형식에 굴복하는 내용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왜 영화가 (소설 등 다른 매체가 아닌) 영화인가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다시 첫 번째 문장. 우리는 왜 <위플래쉬>를 제자와 선생을 다룬 영화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앤드류는 독보적인 천재인가?

 

가능한 한 영화적 요소(카메라)를 지운 채로 <위플래쉬>를 재구성해보자. 세이퍼 음악학교에는 저명한 플렛처 교수가 이끄는 스튜디오 밴드가 있다. 그 밴드는 세이퍼 음악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앤드류의 표현을 빌리자면) 즉 모든 유수의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플렛처 교수의 교육방식은 무섭기로 소문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학생들을 갈아치우고, 새로 뽑으며, 욕설은 기본이다. 그는 자기 밴드에 대한 애정이 강하며,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성격상 밴드 멤버 하나하나의 실력은 완벽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플렛처는 우연히 드럼 소리를 듣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앞서 얘기한 이야기는 영화가 굳이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다. 즉,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전의 이야기다. 이제 영화의 카메라를 좇아보자. 첫 씬이 기억나는가. 멀리서 드럼을 치고 있는 앤드류. 카메라는 그에게 점점 더 다가간다. 그 쇼트는 플렛처의 시점 쇼트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앤드류를 보는 플렛처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 재구성한 이야기와 달리, 영화의 첫 씬에서 앤드류를 보는 플렛처와 그의 시선(카메라)을 좇는 관객은 앤드류를 ‘왠지 알 수 없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췄을 지도 모르는 학생으로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어서 앤드류의 지극히 사적이고 찌질한 생활을 담은 씬이 나온다. 이 씬은 영웅물, 혹은 천재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다. 바보 멍청인 줄만 알았는데, 영웅 혹은 천재라니!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앞선 씬은 이러한 특성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위플래쉬>에서는 앞의 두 씬이 영화 전체의 방향을 설정해버린 셈이다. 이후 관객은 꼼짝없이 앤드류에게 붙잡힌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천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왠지 그것을 아직 발휘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카메라를 끈 뒤에도 그런 확신을 할 수 있는가. 앤드류가 스튜디오 밴드의 다른 멤버들, 심지어는 같은 드럼 파트를 맡고 있는 태너(네이트 랭 분)이나 라이언(오스틴 스토웰 분)보다 뛰어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잊어선 안 되는 것은, 하지만 잊기 쉬운 것은 앤드류라는 존재를 벗어난 그 모든 것들이다. 세이퍼 음악학교, 스튜디오 밴드, 밴드 멤버들, 그리고 플렛처. 이미 앤드류에게 홀린 이상,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연, 혹은 배경에 불과해진다. 그러나 혹은, 꼭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만약 태너 혹은 라이언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인다고 할 때, 그것은 <위플래쉬>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거라 확신할 수 있는가?

 

플렛처의 거짓말

 

플렛처와 앤드류가 재회하는 씬 이후, 플렛처의 제안으로 둘은 다시 오케스트라 밴드에서 호흡을 맞춘다. 하지만 공연 직전 플렛처가 앤드류에게 ‘엿먹이기’ 위해 합연을 기획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플렛처와 앤드류가 재회한 이후 플렛처는 내내 의중을 숨기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재회씬 이후 플렛처의 말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의 말 하나하나는 어쩌면 ‘엿먹이기’위한 포석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재밌는 것은 소위 ‘명대사’들이 이 씬에서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며 앤드류에게 차분히 건네는 그의 전언에는 그야말로 그의 철학, 교육관, 인생관이 몽땅 들어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플렛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씬이다. (눈물 흘리며 죽은 제자에 대해 얘기하는 씬이 있긴 했지만, 그걸 자기 이야기로 볼 순 없다.) 앤드류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의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플렛처와 손을 잡게 된 것은, 지금껏 보지 못한 그의 진솔한 얘기에서 자신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진심은 텅 빈 껍데기였다. 최소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복수를 꿈꾸는 선생이 ‘진정한’ 선생이냐는 의문은 차치하고, 플렛처는 그런 식으로 끝까지 자신을 숨긴다. 역시 우리는 플렛처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할 수 없게 된다.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모두 내놓게 되었던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플렛처는 단순히 앤드류의 ‘선생’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플렛처의 존재는 발산하며, 그에 대한 어떤 (상반된)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나 플렛처는 카메라에 묶여있고, 카메라는 철저히 앤드류만을 좇는다. 이로 인해, 둘의 관계가 명확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착시현상이다. 명확한 것은 앤드류뿐이며, 명확해 보였던 스승-제자 관계도 지극히 앤드류에 속했을 따름이다. “라이언은 너를 자극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어.”라는 플렛처의 말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그건 또 다른 착시일 뿐이다. 카메라를 다시 치우고, 재구성했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라이언이 앤드류의 자극제였다면, 애초에 앤드류가 태너의 자극제에 불과했다고 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영화가 결코 보여주진 않지만, 앤드류와 플렛처의 관계가 전적으로 여기에 기반을 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