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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Wim Wenders)의 세 번째 다큐멘터리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제네시스>)은 말할 것도 없이 사진작가 세바스치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에 바치는 헌사다. 이 말은 혹시 이 영화를 ‘사진’에 대한 영화쯤으로 알고 보러 갈, 혹은 보고 온 사람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제네시스>는 수많은 사진을 헤집지만, 언제나 에두른다. 말하자면 사진들은 하나의 거울이다. 그리고 거울은 앞에 있는 살가두를 비춘다. 영화는 살가두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1. 무엇 - ‘제네시스’를 향해 온 살가두의 삶

누군가는 원제엔 Genesis라는 단어가 없고, 단지 The Salt of the Earth라는 점을 근거로 ‘제네시스’를 지워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얼마 전 끝난 동명의 사진전을 홍보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은 덤이었다. 물론 <제네시스>는 사진 자체를 다룬 영화는 아니므로 그러한 지적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제네시스’ 즉 (번역된 자막을 그대로 인용하면) ‘천지창조’는 그야말로 영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제네시스’는 또 다른 제목이자 원제인 ‘세상의 소금’과 같은 의미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제네시스>는 크게 세 부분이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일단 벤더스가 살가두와 같이 다니면서 그의 촬영을 담은 부분이 있고, 그리고 살가두가 자기가 찍은 사진들을 설명하며 자신의 삶을 좇는 부분과, 마지막으로 살가두의 아들인 훌리아노 리베이로 살가두가 살가두의 황폐해진 고향에서 살가두의 아버지를 찍은 부분이 있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두 번째 부분, 그러니까 사진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삶의 편력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를 중심으로 봤을 때, 영화는 수많은 부분으로 분할된다. 예컨대 브라질 북부에서의 사진촬영, 아프리카에서의 촬영, 쿠웨이트, 그리고 사헬 지역에서의 촬영 등. 하지만 크게 봤을 때, 영화는 둘로 나눠볼 수 있다. ‘제네시스’ 이전, 즉 사회적 사진(사회적 메시지를 함축하는 사진)을 찍던 시기와 ‘제네시스’ 이후, 즉 천지창조 이후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기 시작한 시기.

 

여기서 왜 하필 우리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 즉 ‘제네시스’에 주목해야 하는가. 영화 초반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에서는 ‘세상의 소금’을 단 한 번 언급한다. 벤더스가 직접 내레이션한다.  세상의 소금은 ‘인간’이라고. 인간이 세상의 보물이라고. 그런데 살가두가 직접 인간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표명한 건 ‘제네시스’ 시기에서다. ‘제네시스’ 이전, 살가두는 한창 사회적 사진을 찍다 돌연 그만둔다. 몇 년 동안 아프리카 내전을 따라다닌 뒤였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눈앞에서 목격한 인간의 잔혹성에 분노했다고. 이후 인간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노라고. 결국 ‘제네시스’ 이전 시기 살가두가 필사적으로 사진 속에 담은 인간 군상은 ‘세상의 소금’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들이 분명 사회적 악조건 속에서 고통과 굶주림에 죽어가는 가련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인간의 폭력성이 낳은 비극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제네시스’ 곧 ‘세상의 소금’이자 보물과 같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살가두는 경이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 아직 이 세상의 반은 천지창조 이후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인간에 대한 회의 이후 되찾은 사진에 대한 욕망은 그를 ‘세상의 반’으로 이끌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동물,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인간들. 이 인간 아닌 인간들이란 자연과 하나 된 인간들이자 태곳적 순수성을 잃지 않은 인간들이다. 결국, 살가두는 지금껏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 회의,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과정을 거쳤다. 두 번째 사랑은 첫 번째 사랑과 전혀 다른 의미이며, 한 번의 부정 이후 ‘되’찾은 사랑이라는 점에서 성숙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단계는 살가두의 삶 그 자체이며, 삼각구조로서(정-반-합) 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씬이 사진이 아닌, 자연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살가두는 예전엔 울창한 숲이었지만, 황량해진 고향으로 돌아가 나무를 심는다. 그리고 영화는 황량한 과거 위에 다시 울창해진 현재의 고향을 오버랩한다. 그는 결국 잃어버린 나무를, 동물을, 폭포를, 그리고 자연을 되찾는다. 영화는 단지 울창한 숲과 아마도 거기 어디 즈음에 있을 살가두를 멀리서 찍은 장면으로 끝맺음 된다.    

 

2. 어떻게 – 카메라 vs. 카메라, 거울, 그리고 살가두 vs. 사진
  
영화에서 재밌는 부분 중 하나는, 카메라와 카메라가 서로를 향하는 순간이다. 즉, 살가두의 카메라(사진)과 벤더스의 카메라(영상)이 마주하는 순간. 벤더스가 살가두를 카메라에 담는 동안, 살가두의 카메라는 벤더스를 향한다. 바로 다음, 당시 찍은 살가두의 사진을 삽입한다. 거기에는 살가두를 찍는 벤더스(정확히는 카메라 감독 및 스탭)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지점은 상당히 오묘하다. 영화를 찍는 카메라를 찍은 사진을 찍은 영화. 영화는 카메라를 거쳐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카메라는 일종의 거울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강렬한 카메라와 사진에 자칫 가려질 수 있던 자기 존재를 과시한다. 영화는 ‘이건 영화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구도가 하나 더 있는데, 살가두와 사진의 관계가 그렇다. 위에서 살폈듯, 영화는 대부분 살가두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중간중간 사진이 흐릿해지고, 그 위에 그 사진에 관해 설명하는 살가두의 얼굴이 흐릿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우선, 사실상 사진을 보는 시선이 벤더스가 아닌 살가두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쳐도, 사진과 살가두 모두 흐릿하게 겹쳐놓은 방식이 낯설었다. 거기서 살가두의 시선은 사진을 향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만 같았다. 말하자면, 흐릿해진 사진은 마치 하나의 뿌연 거울이었다. 살가두는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방식은 어떤 효과를 낼까. 위에서 봤던 것과 유사하다. 영화를 찍은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카메라를 에둘러 영화가 영화 자신을 드러냈듯이, 살가두는 사진을 에둘러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단지 사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까닭이다. 사진은 어떻게 보면 그저 거울이며,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 사진은 살가두와 그의 삶을 충실히 그에게 되돌려준다. 그리고 관객은 사진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살가두를 본다.

 

*사진 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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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별밤 별밤러 2015.03.18 01:26 신고

    까먹고 안 적었는데, 영화의 상당수가 흑백이라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살가두의 사진들도 흑백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영화만 봤을 땐) 살가두의 사진은 그 자체로 흑백인 건지, 원래 컬러지만 영화가 흑백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말하자면 색에 있어서 영화와 사진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영화는 살가두를 좇는 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살가두와 사진은 이런 식으로도 뒤섞이게 되는 거죠.

  2. HUNIs 2015.03.18 16:19 신고

    감정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모습이 정말 우와.. 라는 말을 하게 만드네요.

  3. singenv 2015.03.18 22:12 신고

    흠... 괜시리 어려울 것 같네요~

  4. kkdkek 2015.03.25 14:07

    대단하네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