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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3월 개봉 영화 기대작 다섯 편

삼월은 새로운 시작의 달이다. 아직 학교에 다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게 새해의 시작은 일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삼월이다. 그렇다. 삼월은 누가 뭐래도 개강(혹은 개학)의 달이다. 세 달여 만에 찾아간 학교는 학생들로 붐볐다.

모두 다시 돌아온, 하지만 늘 새로운 삼월을 맞이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바쁘다’는 이유로 삼월에 개봉할 아름다운 영화들을 놓쳐서야 되겠나. 짬이 안 나면 짬을 내서라도 영화관을 찾아가자. 원래 없어야 진정한 ‘짬’이다. 그대들이 애써 마련해 놓은 황금 같은 공강 시간은 이런 데 활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첫 수업을 오후로 잡은 이들이라면, 브라보! 그대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조조 영화를 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내 알기에. 착각이라면, 죄송하다. 그렇지만 이번 달만은 짬을 좀 내보자. 아래 소개할 다섯 작품은 수업 하나 듣는 것보다 훨씬 큰 ‘효용’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건 내가 보장한다.

 

<버드맨>(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 2014), <채피>(닐 블롬캠프, 2015),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루벤 외스트룬트, 2014), <위플래쉬>(데미언 차젤, 2014), <리바이어던>(안드레이 즈비아진세프, 2014).

 

<버드맨> (3월 5일 개봉) - 아카데미지만, 괜찮아

 

영화에 좀 관심 있는 이라면 <버드맨>의 개봉날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버드맨>은 얼마 전 열린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등 네 부분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솔직히 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해 불신하고 있고(다른 영화제에 비해 얼마나 편협하고, 또 늙었는가!), 공식적으로도 아카데미 시상식은 세계 4대 영화제(깐느, 베니스, 베를린, 모스크바) 축에 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아카데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확장하면, 영화 자체에 대한 존중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못 만든, 혹은 잘못 평가된 영화들은 무조건 무시당하고 비난당해야 하는가. “삼류 영화 감독보다 영화를 잘 아는 일반인(=영화를 찍지 않는 사람)은 없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주역이었던 장 뤽 고다르의 말이다. 십분 동감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딱 한 편의 단편 영화 촬영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다. 나는 명색이 촬영 감독이었지만, 카메라를 다루는 법조차 잘 알지 못한 상태였다. 결과는 뻔할 뻔 자. 완성된 영화를 친구에게 슬쩍 보여줬는데, 그놈의 반응은 이랬다. “아마추어치고는 연기가 괜찮네. 그런데 카메라 구도가 영 별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부끄러워서라기보다는 왠지 친구가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역시나. 엔딩 크레딧에서 ‘촬영 감독’ 옆에 적힌 내 이름을 보더니 친구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너였구나.” 멋쩍은 웃음은 덤이었다.  

 

지금껏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영화 촬영 이후,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영화는 보기보다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영화에 대해 논평 하기는 참으로 쉽구나. 그리고 이 두 가지 깨달음은 한 문장으로 통했다. 영화는 영화다. 풀어 말하면, 영화는 영화라는 범주 안에 있고 그 경계는 매우 뚜렷하다. 경계가 뚜렷하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우선 영화의 범주 안팎으로 ‘그들’만의 리그와 ‘우리들’의 리그가 구별된다. 쉽게 말해, 영화는 ‘남의 일’이다. 그런데 동시에,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 왈가왈부하기 쉽다. 내 경험처럼, 남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말이다. 더구나 그만큼 영화는 (다른 예술에 비해) 쉽지 않은가. 벤야민도 말했듯, 우리는 모두 ‘산만한 시험관’이 된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남의 일이다. 여기서 ‘남’ 즉 ‘영화’란 내 알 바 아니지만, 내가 알 법한 그 무언가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고충이 아닐까. 우리 모두 한 번쯤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버드맨>이 과대평가된 졸작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버드맨>을 보지 못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충분히 기대해봄 직하다. 내용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한 마디로 퇴역 영웅이 어떻게 빛바랜 휘황을 짊어지고 사는지에 대한 건데, 이에 대한 내러티브는 (장르 불문하고) 수없이 많다. 다만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대다수 영화팬들이 그러하겠지만) 영상이다.

 

촬영상을 받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그래비티>(알폰소 쿠아론, 2013)의 촬영감독을 맡은 바 있다. 루베즈키는 <그래비티>를 통해서도 촬영상을 받은 바 있다. 그러니까 이 년 연속 아카데미의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버드맨>에서 마치 영화 전체가 원테이크로 찍힌 것처럼 자연스러운 촬영에 대해 격찬했다. 얼핏 본 예고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더욱 영화에 대한 기대는 높아졌다. 거기다 현실과 환상을 중첩해놓는 쇼트도 내 눈길을 끌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끌어안은 영화에서 환상적인 장치의 도입은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가. 혹자는 이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칭했지만, 그러한 장치들이 ‘마술적 리얼리즘’의 본래 의미대로 전복적인 스탠스를 취할까. 이에 대해 나는 좀 회의적이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까. 일단 보고 다시 얘기해보자. 하루 남았다.

 

<채피> (3월 12일 개봉) - 인공지능, 뻔하지 않아!?

 

<채피>는 충격적이었던 영화 <디스트릭트9>(2009)을 연출했던 닐 블룸캠프의 연출작이다. <디스트릭트9>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러한 세계를 표현해낸 상상력과 구성력이었다. 아마 이번 영화도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잘 구현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소재 자체는 식상하다. 인공지능 로봇 얘기다. <빅 퀘스천>의 저자 김대식 박사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정보(input)가 주어졌을 때, 나름의 알고리즘을 통해 결과물(output)을 도출하는 수준이다. 그에 따르면 이르면 2020년에서 30년 사이에 이 상태는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까지는 별로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에 대해서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사회, 경제 등 그야말로 ‘중층적’인 차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두 번째 단계란 흔히 말하듯 ‘사람 같은’ 수준이다. 가까운 영화에서 찾아보면 <그녀>(스파이크 존즈, 2013)의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이 이에 해당한다.

 

불사의 가능성을 갖춘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별다를 바 없는 존재. 이런 존재에 대한 불안은 지금껏 수많은 영화를 통해 형상화된 바 있다. 김대식 박사는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아는 인공지능이 ‘지구에 인간이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대답을 구할까 물었다. 보나마나 ‘아니요’다. 인간은 서로를 증오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존재가 아닌가. 여기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인간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인공지능 앞에서 댈 수 있는 자 있는가. 이러한 불안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 수없이 만들어져 왔다. 대부분 인공지능과 인간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채피>도 이러한 의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기존 영화들과 다소 다르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낡고 볼품없는 채피(샬토 코플리)가 벽에 낙서하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에서 인간과 대적하는 인공지능을 떠오르기란 어렵다. 특히, 예고편 동영상에서 주인공인 줄만 알았던 빈센트(휴 잭맨)의 다소 애매한 스탠스라든지, 조연 정도가 아닐까 했던 디온(데브 파텔)의 생각보다 무거운 분량, 그리고 얼핏 드러나는 채피의 고뇌라든지 등을 보고 난 뒤, 영화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다. 이번에 블룸캠프는 뻔한 소재를 갖고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3월 12일 개봉) - 엥?? 엥??

 

두 개의 예고편 동영상만으로 설레긴 처음이었다. 처음엔 ‘티저 예고편’을 봤다. 별 감흥이 없었다. 짧은 동영상에선 눈사태를 보여줬다. 제목 ‘포스 마쥬어’는 잘 몰랐지만, ‘화이트 베케이션’을 통해, ‘휴가철에 스키장에서 눈사태가 나는’ 재난 영화정도로 추측했다. 재난영화라면 이미 지겹게 봐왔고, 아무리 깐느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바로 찾아본 ‘메인 예고편’에서 내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혹은, 교묘한 편집의 힘을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포스 마쥬어>는 재난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눈사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니 (추측건대) 눈사태 자체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눈사태’는 ‘맥거핀’(서사의 중심에 있지만, 결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 요소)이다. 이 영화는 ‘눈사태’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결코 눈사태는 없었다. 이는 정확히 ‘맥거핀’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포스 마쥬어>는 정확히 말해 (없는) 산사태 이후의 이야기다. ‘메인 예고편’에서는 스키장 눈사태 쇼트 이후 멀쩡히 살아 있는 두 부부의 쇼트로 넘어간다. 더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예상을 보란 듯이 뒤엎는다. “다들 무사해요. (눈사태는) 스키장 기술자들이 알아서 한 거였어요.” 한 마디로 영화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예상은 다시 빗나간다. 이후 별 탈 없을 것만 같았던 그들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이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거짓 눈사태에 직면했을 때, ‘가족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아버지’다. 그에 대한 갈등이 주를 이룬다. 이제야 찾아본 ‘포스 마쥬어’(Force Majeure)의 뜻은 ‘불가항력’이었다.

 

예고편에서만 나는 정확히 두 번 뒤통수를 맞았다. 그리고 아마 영화를 볼 때 뒤통수를 한 번 더 맞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위플래쉬> (3월 12일 개봉) - 서스펜스의 힘을 보여줄 것인가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인공이 <버드맨>이었다면, 그다음은 <위플래쉬>였다. 남우조연상, 음향믹싱상, 편집상 등 삼관왕을 달성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위플래쉬>는 음악영화(특히 재즈 오케스트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의 얘기다. 개인적 욕심, 혹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가득 차서 제자를 달달 볶는 플렛쳐(J.K. 시몬스 분)와, 스승의 비뚤린(?) 지도에 발맞춰 미쳐가는 앤드류.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가 영화의 주를 이룰 듯 보인다.

 

이런 구성의 내러티브는 늘 흥분을 유발하곤 한다. 자기의 잠재력을 모르는 비운의 천재에게 스승은 어떤 식으로 날개를 달아주는가. 이러한 내러티브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자신도 혹시 잠재적인 천재가 아닐까 하는 공허한 짐작, 다만 자기가 몰라서 그럴 뿐이라는 헛된 상상, 거기다 소위 ‘츤데레’ 스승에 대한 매력? 어쨌든 이러한 구성은 그 자체로 매력 있지만, 식상할 위험이 있다. 짐작건대, 스승-제자 관계에 있어선 <굿 윌 헌팅>(구스 반 산트, 1997) 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승부처는 서스펜스에 있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부처, 즉 서스펜스는 <위플래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 즉 음악이다. 음악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모르지만, 음향믹싱상이나 편집상을 거머쥔 것으로 보아, 꽤 유려했던 것 같다. <위플래쉬>에서 음악은 밑바탕에 화려한 색을 입히는 역할을 도맡았을 것이다. 재즈라는, 거기다 드럼이라는 다소 낯선 음악을 어떻게 대중적으로 어필할 지도 관건이다. 예고편의 드럼 소리만으로도 느꼈던 흥분으로 잔뜩 도취되어 있길 기대해본다.   

 

<리바이어던> (3월 19일 개봉) - 냉무

 

솔직히 이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만큼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인데,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전적으로 수많은 영화제에서의 수상 기록 때문이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고, 그의 전작들도 모두 낯설다. 길지 않은 예고편은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리바이어던>이 ‘아버지’를 다룬 영화임엔 분명하지만, 그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짐작하기 어렵다. 보기 전에는 그 어떠한 말도 공허할 것만 같다. 막막히 개봉일을 기다릴 뿐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