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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단막극 다시보기

[단막극 다시보기] <위대한 개츠비>에 바치는 드라마 <위대한 계춘빈>

지독한 짝사랑을 한 남자의 이야기. 위대한 (짝사랑을 한) 개츠비의 이야기다. 피츠제럴드의 이 위대한 소설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며 이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말 단순한 사랑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몇 번을 분석해도 모자를 만큼 위대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쓰는 나도 <위대한 개츠비>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고 그 남자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숭고함만 어렴풋이 깨달은 정도였다. 

2010년에 KBS2에서 방영된 <위대한 계춘빈>을 볼 때의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알지 못했다. 그 때 나는 이 드라마 특유의 밝은 분위기와 “정유미”라는 순수한 매력을 지닌 배우에 반했었다. 그리고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로 멋지게 이름을 알린 윤난중 작가의 독특한 이야기 구성에 빠졌었다.

 

5년이 흘렀고 나도 그 때보다는 조금 달라졌다. <위대한 개츠비>도 읽었고, 이 드라마에 대한 애정으로 드라마 대본도 구해봤다. 그 때 알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위대한 개츠비>의 자음에서 따온 것이고 작가가 개츠비의 위대한 짝사랑에 바치는 드라마였다는 사실을.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다. 제 정신이 아니다. 미술치료를 하는 왕기남(정경호 분)은 유부녀와 끊지 못하는 연애를 하고 있다. 연애라 하기도 민망한 비정상적인 집착이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기남은 그 유부녀가 있어야만 안정을 찾는다. 유부녀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남을 고분하게 자신의 정서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이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왕기남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계춘빈(정유미 분)이라는 여자다. 어린이집 선생님인 그녀는 오만데다 낙서를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왕기남을 지독하게 짝사랑했다. 그녀는 왕기남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왕기남에 대한 광고를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낙서의 범위는 공공기물훼손죄로 이어질 만큼 커진다.

 

어린이집 아이에 대한 미술 치료로 시작된 계춘빈과 왕기남의 관계는 점차 복잡해진다. 왜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는 기남에게 춘빈은

 

“좋아하면 좋은 거지, 이유가 어딨어요.”

 

라는 대답을 남긴다. 하지만 기남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밝히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놓는 기남에게 왜 말 놓냐고 핀잔을 준다. 괴상한 행동을 벌이는 그녀를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잠정적으로 진단내리는 기남이지만 그렇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한편 유부녀와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던 기남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발작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를 구한 건 유부녀가 아닌 춘빈(사실은 그의 집까지 알고 있는 스토커인 그녀)이었다. 그녀는 ‘합죽이가 됩시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기남이 발작을 멈추게 한다.

 

왜곡된 사랑이 난무하는 관계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기남과 춘빈은 점점 서로를 치료한다. 낙서로 공공기물훼손죄 혐의를 받는 춘빈을 구하기 위해 기남은 계속 그녀를 도운다. 그렇게 위기가 고조되며 춘빈이 잡히는 듯 흘러가나 진범이 나타나고, 그 상황에서 이 드라마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무 답도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일을 벌인 용의자를 향해 어디선가 나타난 춘빈은 한 마디를 던진다.

 

“사랑하면 사랑만 해야 하는 거잖아요. 미워하고 욕심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랑하면, 좋은 마음만 가져야 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용의자는 대답한다.

 

“아가씨, 사랑 안 해봤구나. 손꾸락 가지면 발꾸락 가지고 싶고,
발꾸락 가지면 콧구멍도 가지고 싶은거야. 사랑하면 다 그렇게 된다고...”

 

그리고 괜찮냐고 위로를 건네는 기남에게 춘빈은

 

“손가락 만지지 말 걸. 괜히 손가락 만져서 아픈가봐요.
나 이제 그 쪽 그만 좋아할래요.”

 

라는 뼈아픈 말만 남긴다. 짝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장면이었다.

이렇게 드라마는 슬프게 흘러가다 새로운 계기로 왕기남과 계춘빈을 이어준다.

 

“좋아하면 좋은 거지, 이유가 어딨어요”

라는 말에 기남은 춘빈에게 다시 용기를 내어 달려간다. 누군가에 집착하고 이유가 있어 좋아하는 사랑이 아닌, 이유 없이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해피엔딩.

한 번 보면 괴상하게 밝은 드라마지만 두 번 보면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춘빈이 담당하고 있는 어린이집의 한 아이의 대사에서 나타난다.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

 

지독한 사랑을 하는 모든 이에게 작가가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말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건넨 메시지였다.

 

사진 제공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