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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미디어

‘잔혹동시’ 뒤 숨어 있는 진짜 문제는 ‘학원 가기 싫은 날’

이른바 ‘잔혹동시’라 불리는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접한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세간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시가 잔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같은 잔혹한 표현의 원인이 제목에서 드러나듯 학원에 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얼마나 학원에 가기 싫었으면 이런 표현을 쓰면서까지 시를 썼을까?

 

하지만 ‘잔혹동시’ 논쟁은 전혀 다른 측면에서 진행됐다. ‘아이의 정신상태가 의심이 된다’ ‘잔혹함을 넘어 패륜성이 엿보인다’ ‘동시로는 적합하지 않다’ 등의 반응이 주를 이뤘다. 이 과정에서 출판사는 논쟁이 확대재생산 될 것을 우려해 시집을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시를 쓴 아이의 어머니인 시인 김바다 씨는 출판사의 결정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창작물이 잔인하다고 해서 창작자의 정서 역시 문제가 있을 것이라 여기는 시각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시집에 실린 수많은 시 중에서 잔인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는 ‘학원 가기 싫은 날’ 뿐이다. 난처했을 출판사의 입장도 십분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제작자와 제대로 된 협의조차 없이 전량 폐기 결정을 내린 것은 아쉬움이 크다.

 

얼마나 학원이 싫었으면 시 제목이 ‘학원 가기 싫은 날’일까?

 

시를 쓴 아이는 출판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학원 가기 싫은 날’을 해당 시집(‘솔로강아지’)에 꼭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문제의 소지가 다분함에도 이 시를 시집에 넣으려 한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의도가 단순히 시의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기보다는 그 정도로 학원에 가기 싫은 정서를 표현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시를 쓴 아이가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해당 시를 쓴 것이 위험하다는 의견은 자연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억지로 학원가는 것에 대한 불만을 시라는 예술의 영역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누군가(부모, 형제, 교사 등) 원치 않는 걸 강요할 때 반발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반발(욕설, 폭력)은 더 강한 권력관계에 있는 이에 의해 힘을 잃고 더 강한 벌칙이나 훈육의 과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대개 그 이유는 반발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태도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나의 경우, 어렸을 적 무작정 축구를 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강요를 부당하게 느껴 학원을 가지 않고 축구만 한 적이 있다. 당시 부모님은 축구에 대한 내 집요함보다는 학원에 가지 않은 행위를 강조하며 혼을 내셨다.

 

연령만으로 문학적 가치 판단하는 건 위험

 

‘잔혹동시’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이는 시로써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해당 시는 일차적으로 부모에 대한 공격성을 담고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학원에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아내고 있다. 또한 부모를 공격하지 않고, 현실을 (패륜이라는 형식으로) 뒤틀지 않으면 학원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비판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들은 여전히 표현 자체만을 문제 삼는다. ‘아이가 쓰기에는 너무 잔인한 시’라는 평가 뒤에는 ‘아이들에게 학원은 너무 잔인한 곳’이라는 주제의식이 빠져 있다.

 

얼마 전 ‘A씨에 관하여’라는 소설을 읽었다. 작가가 16세에 쓴 소설에 비하면 작품은 꽤나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약 소설가의 나이를 알지 못했더라면 작품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출판사는 소설의 마지막 챕터로 작가 인터뷰를 실음으로써 16살 소녀의 천재성을 부각했다.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나이를 강조한 마케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이 탓에 작가 고유의 세계관이나 주제의식이 감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잔혹동시’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에서는 아이의 문학적 재능만을 강조하는데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옳은 현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본인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담아냈고, 어른들은 단지 그것에 놀랐을 뿐이다.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시를 쓰는 데 있어 나이는 제약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축구를 잘하는 아이에게 왜 벌써부터 화려한 개인기를 부리느냐고 탓하는 것과 같다.

 

국문과를 나왔지만 아직까지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알고 있다. 사회적 반향이 크면 클수록 그 시의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진 출처: 가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