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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디세이아] 16. 취중일기

category 에세이/푸디세이아 2017.03.01 23:37

[푸디세이아] 16. 취중일기.

 

술을 살짝 과하게 먹고 나서 글 쓰는 일을 선호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으므로 손이 가는 대로 노트북을 친다. 탁탁 거리며 울리는 키보드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하다. 기분 탓인가.


판을 키운다. 분명 시작은 2명이었지만 결국엔 여섯까지 늘었다. 연속해서 이틀을 같은 사람들을 봤으나, 그럼에도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진 않았다. 사람 만나는 일을 그토록 귀찮아하건만 그럼에도 즐거울 땐 즐겁다.

 

1차. 유진. 기껏 약속을 6시 반으로 잡았건만 평생 그런 적이 없던 이들이 뭐라도 잘못 먹었는지 일찍도 모인다. 장소를 묘사하면서 동선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한참을 까였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려나. 다섯이서 녹두전 3개에 냉면 4, 설렁탕 1, 수육 1개를 시켜 노나 먹는다. 1차라지만, 술 없이.

 

탑골공원부터 광화문 광장까지 가는 길엔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걷는 길엔 광장으로부터 돌아 나오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태극기의 흔적이 보일 때마다 흠칫 놀라지만, 그럼에도 되도록 욱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이 모든 과정이 결국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우상’들이 깨지기 위한 길고 고통스런 과정의 일환이라고 믿는다. 몇 달을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도, 홀린 듯 태극기를 들고 점점 취한 듯 변해가는 이들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오지 않을까.

 

비록 확신은 없지만.

 

뒤늦은 광장엔 사람들이 없었지만, 어찌어찌 정리집회까진 본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와중에 간혹 방향을 잃지만, 길을 잃진 않았다.

 

2차는 광장시장. 육회를 시키고, 예상 못한 타이밍에 한 사람이 더 오고, 다시 술을 시킨다. 3월의 시작,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가장 바쁠 1년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아마도 많은 것이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리기를 바라지만, 사실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네 삶은 다시 정신없이 흘러갈 테지만, 그럼에도 오늘 하루만큼은 좋다.

 

같은 곳에서 뻗어 무수히 다른 길로 흩어져가는 인생이건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서로 교차하며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 정도만 돼도, 괜찮은 삶이지 않은가.

 

비록 몸은 집이지만 아직도 나의 영은 여전히 광화문과 종로 어딘가에서 맴돈다. 하루가 주룩주룩 비와 함께였지만, 기분만큼은 쾌청하다. 

 

B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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