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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힘을 좀 뺐더라면

category 영화/주말이다 영화야 2017.02.18 18:33

김태윤 감독의 신작 <재심>은 2016년 11월 17일 무죄 판결이 난 익산 약촌 오거리 사건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도입부의 설명과는 달리 영화의 메인 플롯은 사건이 일어난 거의 그대로를 담고 있으며, 세부적인 부분들 역시 현실을 강하게 반영했다. 영화적 장치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부분들 - 별명인 '다방 꼬마'나 여관에서의 폭행과 같은 강압적 수사, 모티브가 된 박준영 변호사와 변호사 준영의 유사성 등 - 마저도 사소한 디테일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제법 많은 정도다. 지나치기 쉬운 수원역 노숙자 살인사건에 대한 묘사 역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에 대한 헌사를 위한 치밀한 장치로 느껴질 정도다. 정리하자면, 영화는 생각 외로 영화를 위해 현실을 감하는 일이 거의 없이, 현실을 반영했다.

그럼에도 영화 <재심>이 현실감보다는 가상의 이야기에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영화가 영화를 위해 스스로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 살을 덧붙인 탓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감독은 현실을 파고들어가 그 내면을 보여주는 대신, 익숙한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 드라마를 구성하려 시도한다. 인물들은 바람을 불어넣은 듯 빵빵한 풍선과 같은 느낌으로 움직이고, 사건들은 다른 영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간간이 섞어놓은 유머 코드는 생각 외로 잔웃음을 주지만, 피식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후반부의 드라마는 감동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역으로 영화를 늘어지게 만든다. 중요한 순간 터져 나오는 독백과 같은 대사들은, 영화의 자연스러움보다는 관객을 향한 연극 무대 위의 배우들의 방백에 가깝다. 그 어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룸에도, 오히려 현실이라고 느껴지기보다는 허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는 영화 <재심>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마저 흐리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온다. <재심>은, 한국 영화 치고는 생각보다 많은 부분들에서 디테일함을 챙기는 영화다. 과거 회상은 반복될수록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로 유용하게 쓰이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현우(강하늘 분)의 설정은 영화 곳곳에서 효과적으로 등장한다. 주요 인물들의 갈등과 내면 묘사는 깔끔하지는 않지만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려진다. 큰 사건의 맥락과 흐름이라는 틀 안에서 볼 때, <재심>은 보통의 한국영화들과는 달리 매끈하게 전개될 가능성마저 엿보였다. 그런 강점들이 과잉으로 인해 가려진 순간, <재심>은 여느 무난한 한국 영화들의 수준으로 격하돼 버렸다.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일 때가 있다.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은,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적으로 후진적인 비극이다. 사건 자체는 단순하지만, 사건만을 놓고 파고들어 갈 때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재심>은 사건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영화의 ‘목적’과, 그를 위해 영화를 대중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영화의 ‘수단’ 사이의 딜레마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현실감마저 들지 않을 정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영화의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지만, 그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조미료를 너무 많이 뿌려 음식의 맛이 가려진 듯한 느낌이 든다. 재료도 좋고 요리하는 주방장의 솜씨도 좋은데, 과한 조미료로 그 모든 장점이 희석된 셈이다.

 

전작 <또 하나의 약속>과 같이 다루기 어려운 주제들을 계속해서 다루려는 점에서 김태윤 감독의 행보는 흥미롭다. <재심> 역시 대작엔 이르지 못해도 보통의 한국 영화로선 적당한 카타르시스와 깨달음을 안겨준다. 그렇기에 <재심>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보여준 -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 가능성들로 인해 아쉬움을 주는 영화다. 힘을 좀만 빼고 더 핵심적인 부분을 깊게 파고들어갔다면, <재심>은 모든 토끼들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By 9.

 

 

*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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