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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곡성>, '무엇'을 '믿을' 것인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믿을’ 것인가?

 

*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정의> 곡성(哭聲) : 슬피 우는 소리

 

1. <곡성>을 ‘봤다.’ 솔직히는, 무엇을 봤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분명 하나의 큰 흐름이 있지만, 그 플롯이 내가 ‘직접 본’ ‘플롯’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어디까지가 (영화속에서의)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수많은 맥거핀들이 마치 잘린 손발처럼 나뒹구는 처참한 폐가 속에서, 그 누구도 주인공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경찰 종구(곽도원 분)은 주인공이지만, 어쩌면 관객보다도 더 못한 처지에 놓인, 너비를 상상할 수 없는 연극 속에서 그 자신조차도 거대한 체스판 속에서 손쉽게 소모되는 폰처럼 하나의 맥거핀 혹은 페이크 주인공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2. 영화는 스릴러와 고어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판타지, 코미디 영화에 가깝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수많은 ‘오컬트’ 요소들과의 혈투를 벌이는 장면은 리얼리즘이란 가면을 쓴 판타지물이고, 그럼에도 결국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종구의 모습은 희극 그 자체다. 그 어떤 잔인한 비극보다 지저분한 블랙 ‘유우머’는, 영화 상영 내내 간간이 터져 나왔던 웃음들마저 감독 스스로 비웃는 듯 한 느낌마저 준다. 어쩌면,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진 관객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감독이 추구했던 ‘코미디 영화’의 결정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3. 한국 영화로서 <곡성>이 가지는 특이점은, 그것이 분명 전형적인 한국 영화적 속성을 띠고 있음에도 기존 한국 영화의 카테고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국 영화 같지 않은 한국 영화라는데 있다. <곡성>은, (전라도 곡성이 떠오르는) 토속적인 제목 아래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풍경과 자연을 담지만, 역설적으로 카메라엔 담긴 모습엔 한국이 ‘어디에도 없다.’ 분명 내가 아는 한국의 시골들과 오버랩되지만, 동시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역설적으로 ‘외부인’(쿠니무라 준)의 집이나 무속인 일광(황정민 분)의 신당이 그 이질감에도 불구, 오히려 그나마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 곡성은, 분명히 실재(實在)하는 공간이지만 오히려 <트루먼쇼> 속 세트장보다도 더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을 준다.

 

3-1. 영화를 보고 나면 꼭 <레버넌트>를 보고난 후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무거움을 느낀다. 차이가 있다면, <레버넌트>가 자연의 광활함으로 압박을 줬다면, <곡성>은 카메라가 담아내는 자연이 주는 그 암울함이 목을 쥐는 듯 한 느낌을 준다는 것?

 

4. 범인은 ㅇㅇㅇ, 사실 알고보니 ㅇㅇㅇ였더라는 식의 스포일러가 범람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보고나면 그 스포일러들마저도 의미를 퇴색시킨다. 감독이 말했듯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자유”라면, 그 어떤 결론도 가능한 동시에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영화가 절대로 “왜 그렇게 되는데?”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연성에 대한 물음조차 짓눌러버리기 때문에 가능하다. 영화 어디에도 “그래서 그렇게 됐다더라”에 대한 힌트는 주어지지 않는다. 힌트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들이, 믿는 순간 순식간에 뒤집혀 신기루가 된다. 세간의 평대로 나홍진은 수많은 ‘미끼’들을 강에 던져 수많은 ‘물고기’ - 그가 만든 판 속의 인물들부터 관객에 이르기까지 - 들을 낚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낚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영화 초반에 던져진 “낚시”조차, 낚시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 모든 것은 물고기를 낚고 있는 낚시꾼의 상상이었다, 라던지. 애시당초 영화를 보고 나왔어도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있는지조차, 사실 의문이 드는 영화다.

 

5. <곡성>을 보기 전 가장 큰 오해를 했던 대목은, <곡성>을 단순한 미스테리 스릴러라고 봤던 것이다. 미스테리, 스릴러란 장르를 가지고 있지만, <곡성>은 어쩌면 가장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이야기이자, 가장 통렬하게 ‘구원’에 대한 얘기를 하는 영화다. 왜 그렇게 됐는지, 어째서 그런 것인지, 실상은 무엇이었는지를 때론 너무나도 뻔한 상징인 ‘까마귀’나 영화 후반부의 무명(천우희 분)처럼 서투르고 다소 허접하게 설명하려하지만, 사실상 그로인해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마치 일광과 무명 사이에서 종구가 고민하듯, 합리적인 이유로, 누구를 믿을 수 있는 근거조차 없다. 무속신앙도, (여기선 ‘신’에 대한 믿음 전반을 아우르는) 천주교적 신앙도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가장 무력한 모습들을 노출한다. 그렇게 <곡성>은 ‘믿음’을 닿을 수 없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밑바닥의 무저갱까지, 영화 후반부 내내 마구 휘저으며 뒤섞어버린다.

 

5-1. 부제 양이삼(김도윤 분)이 영화 막바지 동굴 속에서 본 것은, 그의 믿음의 근원조차 흔들어버리는 야누스적인 무언가지만, 그 역시도 어쩌면 사실인 동시에 거짓이며, 0인 동시에 무한대인 ‘무엇’(무엇은 스포일러)이다. 무명이 말하는 세 번의 닭 울음소리 역시 마찬가지. 종구가 만약 기다렸다면, 그는 그 자신이 간절히 원했고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할 무엇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종구가 맞이해야했던 그 모든 것이, 그가 무명을 ‘믿지’ 않았기에 벌어졌던 일일까. 어쩌면 무명이 스스로 ‘육화’하기까지 하며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 종구를 구원에 이르게 할 무엇을 약속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베드로는 세 번을 부인한 끝에 예수를 저버릴 수 있었다. 무명을 믿지 못한 채 만류를 뿌리친 종구는 세 번째 닭 울음소리가 나는 현장에서 그가 절대 부인할 수 없을 현실을 마주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사실 의미가 없는 <곡성>의 세계 속에서, 어쩌면 무명은 자신의 만류가 결국은 소용이 없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믿음’이, 종류가 다를 뿐 ‘다른’ 것이 결코 아니기에.

 

6. 영화 <곡성>은 마치 장인이 피를 말려가며 수만 시간의 정성을 들여 한땀한땀 조심스럽게 판, 크툴루 신화 속 괴물의 나무 피규어 마트로시카 인형과도 같은 영화다. 얼굴이며 팔이며 본체조차 구분할 수 없는 그 피규어는, 역설적으로 너무나도 세심하게 깎으면서 섞인 핏방울과 땀방울 때문에 더 괴기스럽고 혐오감마저 준다. 그 혐오감을 이겨내고 마트로시카를 한 꺼풀 벗겨내면, 거기엔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형상의 크툴루 신화가 펼쳐진다. 그것은 마치, 이미 죽어있지만 영원히 살아 움직일 것 같다.

 

6-2. 돌고 돌아 영화는 결국,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묻는다. 그 모든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사실 사실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전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마치 아이유의 <스물셋> 가사처럼, 끊임없이 무엇이 사실이지만 사실이지 않다는 것을 집요할 만큼 되묻는다. 그런 점에서 <곡성>은, 도저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요부와 성녀 사이의 ‘소녀’다.

 

6-3.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굿하는 장면. 진짜 굿판처럼, 혼을 다 빼놓는다.

 

7. <추격자>나 <황해>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감독이자 인간 나홍진에 대한 소문을 무시하지 못했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나홍진의 <곡성>은 역대급 영화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영화라고하기엔 너무나 불친절한 ‘랜덤박스’지만, 그것에 혹할 판도라를 욕할 수 없다.

 

8.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구역질과 혐오를 넘어, 그 모든 물음과, ‘믿음’에 대한 회의와 혼란의 숲을 거치고 나면, 그곳엔 더 도무지 형태조차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지만, 인간은 어차피 “욕심이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모순적인 모순 그 자체다. 

 

추신 : 곡성(哭聲)이지만, 정작 울어야 할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오로지 비명뿐이다. 생각해보면 <곡성>은, 이미 제목부터 ‘코미디’였다.

 

by. 9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