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turner'(페이지터너).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기는 사람을 말한다. 연주자와 호흡이 한 번이라도 어긋나 악보를 잘못 넘기면 연주는 흔들린다. 늘 긴장한 채로 연주에 집중해야 한다. 연주자의 숨소리와 팔 움직임도 신경 써야 한다. 페이지터너는 종이 넘기는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튀는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연주자와 관객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페이지터너는 철저히 ’소리‘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26일 방송된 KBS 2TV 청춘 3부작 드라마, <페이지터너>는 ‘우리 인생에도 ‘페이지터너’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던진다. 인생의 페이지를 넘겨야 할 순간에 함께 그 페이지를 넘겨 줄 누군가가 있다고 말이다. 드라마는 세 청춘을 내세워 그들이 서로의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을 3부에 걸쳐 총 180분 동안 보여준다.
첫 방송에서는 주인공들이 좌절을 겪고,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이 드러났다. 피아노와 장대높이뛰기에서 최고가 되겠다며 무리하게 달려온 소년과 소녀는 한 순간에 인생이 뒤집히는 사건을 만난다.
피아노 천재 윤유슬(김소현 분)은 시험에서 1등을 한 날, 엄마(예지원 분)의 차를 타고 학원으로 향하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유슬은 사고로 인해 시신경 손상을 입고 실명한다. 유슬을 질투하는 라이벌이자 2등, 서진목(신재하 분)이 교회에서 그 얄미운 친구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던 순간이었다.
한편, 장대높이뛰기 선수 정차식(지수 분)은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 무리한 도전을 한다. 그는 국내신기록에 도전하다 중요 부위가 장대에 찍히는 사고를 당한다. 다행스럽게도 사고로 인한 손상은 없었지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척추분리증으로 수술을 해야 하고,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것.
소녀와 소년은 각자의 삶에 닥친 불행을 다른 자세로 마주한다. 소녀는 자살을 시도하고, 소년은 웃으며 넘긴다. 그들의 상반된 태도를 불러온 것은 ‘엄마’라는 ‘페이지터너’였다.
유슬의 엄마는 눈이 먼 딸을 위해 어떻게든 다시 피아노를 시키겠다며 방법을 찾는데 골몰한다. 하지만 유슬은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 피아노가 싫어서 눈이 먼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자신을 찾아온 2등, 진목에게 고백한다. 실명했는데도 피아노를 계속 치라는 엄마의 지독함에 질려버렸다는 것이 유슬의 속내였다. 마침 유슬의 자살 시도를 눈치 챈 차식의 기지 덕분에 자살 소동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지만 유슬은 실명을 기점으로 변한다. 그녀는 피아노를 포기하겠다고 엄마에게 선언하며 삶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차식은 오히려 의연한 쪽이었다. 실망하는 엄마를 외려 위로하며 괜찮다며 웃어 넘겼다. 심지어는 자살을 하려는 유슬에게 “네 엄마가 들으면 뒤통수 맞는 기분이겠다”며 직언을 아끼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마음의 품이 넓고, 늘 유쾌한 그도 목표가 꺾여버린 힘든 마음을 끝내 털어내지 못했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차식은 엄마와 소나기를 만난다. 마침 엄마는 우산을 챙겼다. 다행으로 여기며 우산을 펼쳐보지만, 고장 난 우산은 미사일처럼 날아가 버린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차식은 크게 웃어버린다. 비는 내리고, 우산은 펴지지 않는 상황에서 차식은 웃다가 울어버린다. 꾹꾹 눌러온 절망감을 표현한 순간이었다.
과거 MBC 드라마 <앵그리맘>에서 고등학생 ‘고복동’으로 분했던 배우 지수의 연기가 빛난 순간이었다. 그는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며 순간적으로 보는 이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 앞으로 어떡해...”하면서 엄마를 안으며 우는 그의 모습은 날개를 잃은 새 그 자체였다.
날개가 꺾여버린 두 청춘을 보니 2016년을 살고 있는 청춘들이 떠올랐다. 10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또는 목표를 절대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린 청춘들이 절망을 대하는 태도를 드라마는 대표적으로 보여줬다. 누군가는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애써 웃으며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물론 새로운 날개를 달기까지 수없이 많은 아픔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에는 드라마가 어린 10대들의 삶을 발랄하게 그린다 생각했는데 전혀 가볍지 않았다. 지금 2016년 3월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각자의 페이지를 넘길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모두에게 말이다. 드라마는 남은 120분간 첫 번째 페이지를 넘긴 등장인물들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페이지로 향하는 모습을 그릴 것이다. 서로 울고, 웃고, 싸우며, 협력할 것이다. 서로의 페이지를 넘겨주는 ‘페이지터너’를 다루는 만큼, 앞으로 드라마가 현실의 페이지를 매만지는 청춘들에게 위로, 결단, 도약의 메시지를 선사하길 바란다.
P.S) 모처럼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터놓을 수 있는 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목표를 이룰 수도 없게 된 청춘은 어떤 기분일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온 청춘은 어떤 마음일지, 목표를 종종 잃어버리고 다시 찾으려 애쓰는 나 같은 청춘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지 궁금했다. 답은 없다. 다만 가끔 단비처럼 나타나는 드라마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가 삶에 답을 내려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질문을 던져준다.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아니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고 말이다. 삶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드라마 <페이지터너>가 삶의 단비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