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이자 소설가였던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개인이 사회에 통제당하는 전체주의를 그리고 있다. 모든 것을 감시하는 ‘빅 브라더’로 불리는 당은 개인의 원초적인 욕구까지도 통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독재와 통제에 반발심을 표출하지만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다 사회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만다.
단막극 <계약의 사내>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1984』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한 요양원을 중심으로 환자들의 행복을 조종하는 간호사 수영(최명길 분)의 모습이 등장한다. 개인의 욕구를 통제하는 ‘빅 브라더’와 닮았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는 개인을 감시하는 감시원들이 있다. 주인공인 감시원 진성(오정세 분)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간호사를 감시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그녀를 감사하다 진성은 상황이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요양원의 위장된 행복을 알아채고 이것에 저항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억압된 현실에 순응하고 만다. 주인공의 상황, 감정 변화 역시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그것과 닮았다.
<계약의 사내>는 다른 단막극과 달리 친절하지 않다. 설명도 부족하고, 대사도 적다. 오히려 의도된 카메라 워크, 다양한 해석이 필요한 침묵들이 주로 보인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서 오히려 다채로운 생각의 갈래를 펼칠 수 있었다. 이야기 작품이 어떤 시대, 상황을 상징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나는 <계약의 사내>를 조금 위험한 상상으로까지 발전시켰다.
한 정부의 수장이 자신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진실을 깨달은 그 누군가는 도리어 배척당하고, 사회에서 도태된다. 이 문장에서 1984년이 아닌 2015년을 사는 우리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드라마는 결말이 있었고, 우리가 사는 현실의 결말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드라마의 결말은 비관적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감시원은 진실을 요양원 사람들에게 밝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외려 악(惡)이라고 할 수 있는 요양원 간호사에게 조롱만 당하고 만다. 그렇게 감시원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현실로 돌아간다. 드라마는 소설 『1984』처럼, 디스토피아를 제시하고 끝을 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마저 디스토피아가 돼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국가에게 감시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또 기득권의 움직임으로 인해 하나의 가치만 존재하는 것처럼 강요받는 일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비관적으로만 세상을 본다면 슬프다고 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수많은 생각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또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가치관과 의견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표현하려 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행위도 그 중에 하나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이고 상식을 기반으로 한 연대다.
<계약의 사내>는 진실을 깨달은 한 개인이 그것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혼자’만의 노력을 보여줬다. 그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 노력을 통해 우리는 깨달음을 얻었다. 강한 것 앞에서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 어렸을 때부터 나뭇가지 교훈을 통해 수없이 배웠지만 쉽게 체득이 되지 않는 논리다. 드라마는 다시 한 번 이 가치를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말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쓴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가치만 강요되는 사회’에 반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의 방법은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표현해야만 한다. 이것이 단막극 <계약의 사내>가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던진 화두였다.
- by 건
사진 출처 : KB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