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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베테랑> 조태오는 악마인가?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7)와 <부당거래>(2010) 사이는 류승완에게 이를테면 단절의 시간이었다. 이에 대해 주성철은 류승완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향하는 과정이었다는 주석을 달기도 했는데, 당시 류승완은 직접 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제는 내 취향의 전시뿐만 아니라 시대적 정서나 환경, 그리고 타이밍에 대한 고려도 중요하다고 여긴다. 더불어 내적으로는 언제나 장인으로서의 명품을 만들고 싶다.”

 

문화예술계 이곳저곳에서 ‘표절’ 문제로 화끈 달아올라 있는 지금. ‘오리지널리티’를 운운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건 차치하더라도, 그게 ‘오리지널리티’든 ‘짜깁기’든 ‘오마주’든 ‘패러디’든지 간에 어쨌든 류승완이 <부당거래> 이후 <베를린>(2012)과 <베테랑>(2015)을 통해 확실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건 사실이니까. 말하자면 그의 변화란 액션 혹은 코믹이라는 장르에 천착하고 영화광으로서 보고 배운 것들을 직접 형상화하는 (철저히) 영화적 기쁨과, 사회에 대한 민감함과 시대적 분위기를 읽어내고 필름에 담아내려는 신념, 둘의 차이와 같다.

 

1.

 

<베테랑>은 류승완의 새로운 흐름 와중에 특히 <부당거래>와 많이 닮아 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정치적 그늘을 겁 없이 까발리고, 법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의) 순환적, (카프카가 꿰뚫었듯) 초월적, 형식주의적 성격으로 인한 사각지대를 꼬집으며, 돈 아래 기생하는 제도의 허점을 파헤친다.

 

그런데 <부당거래>에 비해 <베테랑>은 류승완이 의도한 바대로 명확하고 쉽다. 도대체 누가 나쁜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부당거래>에 비해 <베테랑>에서 나쁜 놈과 착한 놈이 누군지는 분명하다. 또한 서사의 구조도 훨씬 단순하다. 다양한 상황과 갈등이 섞여있긴 하지만, 조태오(유아인)을 쫓는 서도철(황정민)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머지는 다 ‘아웃 오브 안중’이 된다.

 

그를 위해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여 관객들의 시선을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정에 집중시킨다. 독특하고 실험적인 컷(특히 초중반부에 씬과 씬 사이를 주목해보라), 꽤 길게 이어지는 롱 쇼트들. 무엇보다 류승완표 짜릿한 액션 씬들이 그렇다. 화려한 카메라 워크와 짜릿한 배우들의 액션, 적절할 때마다 터져주는 음향효과란! 역시 류승완은 류승완이었다.

 

그렇지만 영화를 명쾌하게 만들고, 서사구조를 하나로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반대로 놓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조태오와 서도철이 숨가쁘게 쫓고 쫓기는 와중에, 나는 ‘왜?’라는 질문을 던질 틈도 없었거니와 영화는 ‘왜?’에 대한 질문을 굳이 마련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여기 정의를 구현하려는 ‘선인’ 서도철이 있고, 나쁜 짓만 골라하는 ‘악인’ 조태오가 있다. 영화는 이 명확한 프레임 속에서 선이 악을 축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프레임 속에서 모든 것은 명백하지만, 프레임 밖, 그리고 프레임 뒤에 있는 것들은 관심 밖이다.

 

프레임을 벗어난 모든 것들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왜 서도철은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구현하려 하는가? 중고차 사기단을 검거한 이후 승진에 들떠있던 서대철은 어떻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실을 좇기 시작했는가? 조태오(유아인)은 악마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태오는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그렇다면 그는 정말 문자 그대로 ‘악마’일 테다), 아니면 후천적으로 환경적 영향을 받아 그렇게 자라난 것인가?

 

2.

 

이건 괜한 딴지가 아니다. 시비 걸게 없어서 영화가 다루지 않은 것을 기어코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영화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 액션을, 스릴러에서 로맨스를 기대하는 바보는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인물들의 모든 사정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서도철의 과거사, 조태오의 과거사를 모두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내가 딴지를 거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류승완 스스로 조태오라는 인물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조태오는 누가 봐도 악인이다. 조태오라는 캐릭터에는 현실 사회의 드라마 같은 ‘사건’들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스며들어있다. 그런데 류승완은 어떤 인터뷰에서 조태오가 악마라기 보단, 사회적, 경제적으로 형성된 존재라고 말했다. 더불어 조태오는 한 개인이 아니라, 비뚤어진 사회적 구조를 표상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류승완은 또 다른 인터뷰에서 조태오에 대해 ‘그냥 나쁜 놈’이라고 표현했다. 그냥 나쁜 놈이란 곧 악마다. 사회적 형성물과 악마. 둘 사이의 괴리는 곧 <베테랑>의 딜레마다. 바로 이어서 딴지를 거는 두 번째 이유. 악마는 존재하는가? 악마라는 캐릭터의 형상화와, 그에 대한 징벌은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 혹시 그건 분노, 슬픔 등의 감정적 과잉을 편리하게 소비해버리는 방편은 아닌가?

 

개인적으로 악마는 없거나, 최소한 부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얼마 전 읽은 테리 이글턴의 <악>의 영향도 있겠다.) 굳이 선택하라면, 나는 조태오의 악마적 특성은 환경이 만든 산물이라 본다. <데드 맨 워킹>(팀 로빈스, 1995)에서 ‘감옥에는 가난한 사람들뿐이’라는 매튜 폰셀렛(숀 펜)의 말처럼. 물론 이는 위에서 말했듯, 류승완도 염두에 두고 있던 점이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 악마라는 존재는,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형벌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컨대 유병언의 죽음은 세월호 정국에 어떤 변화를 야기했던가. 그는 세월호를 둘러싼 모든 구조적, 정치, 사회적 균열을 체화한 악마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나쁜 놈’ 유병언의 죽음은 악의 소멸을, 곧 세월호 정국의 해소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에 대한 형벌은 희생양 제의와 맞닿아있다. 희생양의 죽음이 그렇듯, 악마에 대한 처벌은 불가해한 현상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다. ‘한 놈 잡아서 상황 종치자’라는 생각에서 둘은 다를 게 없다.

 

같은 맥락에서 조태오가 악마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자칫 진정한 문제를 가리는 가림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승완은 또한 악마로서의 조태오라는 캐릭터에 대한 거리감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 탓인지 모르나, 영화의 결말은 새로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 지점이란 희생양 제의, 그 이후다. 가뭄이 그치지 않아 희생양을 신께 받쳤다 치자. 이후 운 좋게 비가 내린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는 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악마를 죽였는데, 불가해한 현상이 유지된다는 것. 그건 곧 악마라는 존재가 사라진 사회의 구조적 공백을 의미한다. 문제는 악마가 아니었다는 것, 보다 더 근본적인, 구조적인 차원이 문제라는 것을 눈치 채는 순간을 의미한다.

 

굉장히 유사한 구조의 <공공의 적>(강우석) 시리즈와는 달리, <베테랑>의 결말은 시원치 않다. 통쾌하지 않다는 말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겨우’ 공판이 시작할 것이고, 법정 앞에서 조태오의 표정에서는 분노도, 슬픔도 읽을 수 없다. 현실로 미뤄보건대  조태오는 감방에서 적당히 살다가, 아니면 집행유예로 풀려나 뭔 일 있었냐는 듯이 살아가지 않을까. 상상으로나마 ‘죽지 않은’ 조태오를 마주한 나의 불편함은 그를 둘러싸고 악의 비릿함을 풍기는 사회를 향한다. 도대체 악은 어디에 있는가? 

 

 

by 벼

 

*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