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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대한 세 가지 키워드

<한여름의 판타지아> 상영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영화관 직원이 팸플릿을 하나 건넸다. 팸플릿에는 영화의 배경이었던 ‘고조’시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지도 안에는 영화 촬영지가 하나하나 표시되어있었다. 앞 페이지에서는 ‘영화 촬영장소에 가보자!’라는 문구가 돋보였고, 뒷 페이지 하단에는 일본의 각 지역에서 고조로 가는 방편이 적혀있었다. 말하자하면 나는 영화를 보기 직전에 일본 관광 안내 책자를 받은 셈이었다.

그 전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다. 왜 일본인가? 팸플릿을 받은 이후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영화는 도대체 일본 관광 진흥을 위한 홍보 영화인건가? 장건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찍게 된 계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작 '잠 못 드는 밤'(2010)이 일본에서 열린 나라영화제에 초청됐다. 그 영화제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집행위원장으로 있는데 '나라티브'(Narative)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나라와 내러티브를 합친 말로 나라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을 기회를 대상 수상자에게 준다. (중략) 맞다. 영화제가 끝나고 한 달 뒤엔가 연락이 왔다. 당시 대상 수상자였던 뉴질랜드 감독이 개인적인 이유로 하차했다면서 같이 해보자고 하더라. (중략) 영화제가 선정한 특정 지역에서 촬영해야 하고, 일본 스태프와 배우들과 작업해야 했다.

 

그러니까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애초에 ‘나라’와의 밀접한 관계라는 조건 하에서 찍게 된 영화였다. 영화의 기본적인 기획은 감독 밖에 있었다. 일본이라는 배경, 일본 배우, 일본어, 그리고 팸플릿까지. 모든 의문들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결코 그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장건재의 답변이다. “그러나 내 영화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로 시작했다. 주어진 조건은 내가 가진 재료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했다.”

 

결국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기본적인 제약 속에서 감독의 독창성 혹은 자의식이 어떻게 발휘되는가?’일 테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장건재만의 자의식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여러 이야기를 묻어내는 방식’에 있었다. 한 폭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이 영화는 완성된 하나의 회화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회화를 그리는 모든 과정, 그러니까 밑그림을 그린 이후 채색을 하는 과정 전체를 보여줬다. 그러므로 회화를 먼저 마주했다면 결코 알지 못했던 것들, 그러니까 영화를 구성하는 전제, 혹은 밑그림을 우린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과정을 (후방 귀납법의 방식으로) 차근차근 살펴보자.

 

1. 회화 – 영화 속 영화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크게 두 ‘챕터’로 나뉘어져있다. 챕터1에서 일본에서 영화를 찍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는 감독 태훈(임형국 분)은 고조를 둘러보며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챕터2는 그 이후 태훈이 찍은 영화다. 그런데 챕터1의 형식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챕터1은 분명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기초적인 형식(인터뷰, 주변 풍광)을 제외하면 영화는 결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애초에 감독이라고 등장하는 인물은 장건재가 아니라 임형국이다. 그뿐만 아니라 카메라나 편집은 결정적으로 이 챕터를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예컨대 요시코가 나오는 환상 씬들이 그렇다. 그 씬들은 ‘대놓고’ 이 챕터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거기다 다큐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쇼트/리버스 쇼트도 그렇고, ‘잘생긴’ 공무원과 같이 고조를 돌아다니는 씬 중 어느 한 골목에서 할머니 사진을 찍는 씬은 누가 뭐래도 ‘연출’되었다. (영화)카메라 앞에서 (영화)카메라를 향해 (사진)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서 태훈이 (사진)카메라를 찍는 행위는 단지 (영화)카메라에 찍히기 위함이었음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챕터1은 다큐멘터리(혹은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와 극영화가 혼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은 불가피해진다. 왜 굳이 둘을 섞은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게 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둘은 뒤섞은 것은 무슨 효과를 노렸던 것일까? 

 

2. 채색 – 장건재(태훈)의 이야기

 

챕터1의 감독 태훈이 찍은 영화인 챕터2에서는 챕터1에서 등장했던 사건, 인물, 대사들이 변주됨으로써 반복된다. 마치 꿈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제스처, 이야기들이 혜정(김새벽 분)과 유스케(이와세 료 분) 둘의 이야기로 중첩된다. 일차적인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즉,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위해 챕터1을 할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챕터1에서 드러난 수많은 ‘진짜’ 이야기들이 챕터2에서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잘생긴’ 공무원의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둘 도시로 떠나 텅 비어버린 시노라하라에 남은 이들의 외로움 등은 이상하게 챕터2에서 가려져있다. 이를테면 챕터1에서 계속해서 주지하듯 영화(챕터2)는 ‘로맨스’ 장르이며, 고조에 다다른 혜정에게 고조는 그저 사람 없고 조용한 도시다. 그녀에게 고조의 역사, 사람들은 부차적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조용한 곳을 찾았고, 단지 고조는 그런 의미에서 적합한 공간이었다. 유스케는 분명 챕터1의 다양한 인물들을 집적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유스케는 고조와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점차적으로 혜정에게 빠져 들어가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보자. 만약 영화가 챕터2로만 이뤄져있었다면? 혹시 어딘가 허전할 것 같다 생각하는 이들은 이제부터 집중하시길 바란다. 영화를 다 본 뒤, 챕터2만으로 영화가 이뤄져있었다면 어딘지 허전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챕터1이 단지 챕터2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오히려 챕터2보다 더)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살짝 언급했지만, 챕터2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중첩되어있다. 우선 ‘진짜’ 이야기, 그러니까 진짜 고조시의 이야기들이다. 그건 고조시의 풍경, 고조시 사람들의 이야기, 삶이며 영화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가짜’ 이야기다. 그건 감독 태훈의 이야기며, 더 나아가 장건재의 이야기다. ‘진짜’ 이야기와는 반대로, 이 이야기는 고조시와 별다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예컨대 챕터1에서 태훈 혼자 겪는 모호한 사건들이 그렇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챕터2는 대부분 ‘가짜’ 이야기가 전면적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챕터2만으로는 어딘지 허전한 까닭이다. 어쨌든 챕터2는 태훈의 이야기다. 그는 자기가 겪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챕터2는 전적으로 태훈만의 ‘가짜’이야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중심은 그가 창조해낸 두 인물의 관계에 있으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은 배경에 불과하다. 

 

3. 밑그림 – 고조시의 이야기

 

챕터2에서 ‘진짜’ 이야기는 하나의 배경이다. 이 배경은 두 인물의 관계, 긴장, 사랑, 사건 밖에서 ‘주어져’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화려한 채색 속에 감춰진 밑그림이다. 밑그림은 채색을 위한 아주 기초적인 전제이지만, 완성된 그림 앞에서는 흐릿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결코 챕터2만 보고서는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챕터1의 오묘한 형식은 의미심장하다. 이를테면 챕터1에서 나뉘었던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는 챕터2에서 이어지는 ‘진짜’ 이야기와 (보이지 않는) ‘가짜’ 이야기를 인식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였던 셈이다. 회화의 비유를 이어 하면, 챕터1로 인해 비로소 우리는 챕터2의 완성된 그림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채색 단계 이전의 밑그림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정수가 챕터2가 아니라 챕터1인 까닭이다. 챕터1은 그야말로 챕터2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풍성하게 해줬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위에서 들었던 예를 다시 가져와보자. 챕터2에서 고조는 단지 조용하고 인적 드물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인가. 그녀가 ‘우연히’ 들른 고조시는 누군가에게는 ‘마돈나’가 머무는 곳이며, 누군가에게는 여럿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외로움이 배어 있는 곳이며,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의 달콤함이 오랜 액자 속에 남아있는 곳이다.

 

이 모든 것들은 챕터1 덕분에 챕터2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결코 직접적으로 형상화되거나 보이지는 않지만, 낯익은 풍경 속에 일일이 깃들어 있다. 결국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 이야기를 말하는 셈이다. 달뜬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와, 달뜬 와중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표정 속에 숨겨진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챕터1과 챕터2는 모두 불꽃놀이 씬으로 끝난다. 불꽃놀이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건 단지 불꽃 색깔이 아름답고 화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꽃놀이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햇빛 가득한 대낮이라면 무슨 소용이랴. 진정 불꽃놀이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불꽃의 화려함에 가려진 주위의 모든 어둠 때문이리라. 챕처2의 컬러 앞 챕터1의 흑백이 그렇듯이 말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
*인터뷰기사: [인터뷰①]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감독 "'비포 선라이즈'? 로드무비에요"(SBS연예스포츠)
http://sbsfune.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E10006781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