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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투모로우랜드>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

얼마 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조지 밀러, 2015)와 <투모로우랜드>의 세계관을 대조한 글을 봤다. 두 영화를 모두 다 봤으므로 반가운 마음에 읽었다. 글의 요지는, 전자는 미래에 대한 비관을 담은 반면, 후자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매드맥스>는 ‘미래’에 대한 비관을 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매드맥스>는 미래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내가 <매드맥스>를 SF가 아니라 판타지로 분류하는 까닭이다. 반면에 <투모로우랜드>에서 그린 세계는 (비현실적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다. <매드맥스>를 보고 현실을 반추하는 일이란 결코 없을 테지만, <투모로우랜드>를 보고 나면 저절로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투모로우랜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담고 있지 않다. 물론 영화는 인물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낙관을 옹호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 긍정의 힘을 설파한다. 하지만 ‘낙관’을 얘기하는 것과 미래를 ‘낙관’하는 것 사이에는 넓은 틈이 존재한다. <투모로우랜드>는 어떠한 낙관적 미래상도 제시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펼쳐질 ‘진짜’ 미래의 도입부에서 영화는 끝난다.

 

1. 이분법의 한계 – 긍정은 어디서 오는가

 

‘낙관하라!’는 전언과 ‘미래는 낙관적이다.’라는 메시지 사이의 어긋남은 영화의 전개를 ‘갈지之 자’로 만들었다. 영화는 마치 “나만 따르라!” 해서 따라갔더니 아무것도 없자, “뭐가 있을 거라곤 안 했잖아.”라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 갈팡질팡은 기본적으로 영화의 프레임 때문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는 집요하리만큼 ‘포기하지 않는 것’, ‘긍정’, ‘낙관’ 이런 것들을 강조한다. 프랭크 워커(조지 클루니 분)도, 케이시 뉴튼(브릿 로버트슨 분)도, 심지어 어린애라기엔 ‘아름다운’ 로봇 아테나(라피 캐시디 분)마저 ‘긍정’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긍정’의 복음은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공간, 다양한 시간에서 동일한 전언들이 지치지도 않고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된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그러한 메시지가 반복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영화의 프레임이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이라는 식으로 이분화 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영화 초반, 케이시의 학교 씬에선 ‘디스토피아’, ‘자연 재해’ 등을 운운하는 선생님들과 케이시를 대조한다. 왠지 그들은 케이시가 질문하려고 든 손을 외면한다. 그 중 한 명이 끝내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묻는다. “또 무슨 질문이야, 케이시?” 케이시가 답한다. “그렇게 미래가 부정적이라면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거죠?” 둘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인식은 다음과 같다.

 

비관주의자들은 세계의 종말을, 멸말을, 끝을 인식하고 설파하지만 정작 그것을 고칠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닉스 총독(휴 로리 분)이 나름 날카롭게 짚었듯, 그들은 오히려 그걸 즐긴다. 그들에게 미래의 종말이란 테마는 자신의 지적 유희와 우월함을 확신하는 자위 수단에 불과하다. 케이시의 질문을 외면했던 건, 아마 그 이전부터 케이시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기 때문이리라. 그때마다 그들은 얼버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고,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이런 식으로 낙관주의를 한껏 띄우는 동시에 비관주의를 한껏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이 옳은 프레임인가. 낙관과 비관은 정말 칼로 자르듯이 나뉠 수 있는가? 낙관과 비관의 출발점은 다르지 않다. 둘은 모두 ‘위기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낙관의 메시지 앞에는 ‘그럼에도’라는 부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 누구도 30대에 전무가 된 재벌 3세가 “나는 이 회장이 될 거야.”라고 꿈꾸는 것을 낙관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 없이는 낙관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낙관과 비관은 양날의 검이다. 당연히 비관도 위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종말론과 과학만능주의는 양 극단에서 서로를 보완하고 지탱한다. 비유컨대 70년대 남북 관계와 유사하다. 지금으로 따지만 미국과 북한의 관계와 닮았다. 비관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혹은 낙관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낙관도, 비관도 없을 것이다. 악마 없이 천사 없듯, 천사 없이 악마 없듯.

 

2. 기묘한 엘리트주의

 

영화의 다소 촌스러운 결말에서 드러나는 기묘한 엘리트주의는 그런 어쭙잖은 이분법에서 기인한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투모로우랜드>는 프레임이 현실의 복잡한 흐름과 만났을 때 어떻게 삐걱 거리는지를 몸소 ‘체현’했다.

 

내가 말하는 엘리트주의란 ‘선택된 자들’이라는 코드다. 애초에 프랭크나 케이시 모두 ‘선택된 자들’이었다. 물론 그 기준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말했듯, 영화의 결론부에서는 낙관적인 미래를 보여주지 않고, 대신 낙관적인 존재들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거는 것으로 끝난다.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지구의 존재들이 힘을 합쳐 장밋빛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렇게 주장과 질문 사이에서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악의 축, ‘비관주의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미래를 볼모로 잡아 현재를 좀먹는 무리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케이시의 표현을, 빌려 나쁜 늑대에게는 언제나 먹이가 던져질 것이다. ‘낙관주의자’들에 의해 진일보된 사회가 그들로 인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그들을 처단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는 그런 제스처조차 취하지 않는다. 그건 결코 <투모로우랜드>가 디즈니 영화이기 때문도, 어린 아이들을 타게팅했기 때문도 아니다. 영화의 주제가 그렇듯,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에 영화의 초반을 제외하고 비관주의자들은 애초에 프레임 밖에 있다. 이상하게도 여기서 나는 케이시를 무시했던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선생님들에게 난해한 질문을 일삼는 케이시가 불편했듯, 영화에게 비관주의자들의 존재는 불편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 비관주의자는 낙관주의자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가 ‘기묘’해지는 지점이다. 미래를 위해 소집된 낙관주의자들은 인류의 일부(심지어 소수)일 뿐인데, 도대체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인류 전체를 구해야 하는가? 영화는 끝내 이 질문을 외면한다. 케이시에게 선생님들이 그랬듯. 답을 모르니까, 아니 애초에 답이 없으니까. 인위적으로 가른 낙관과 비관이 사실은 다르지 않으니까.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