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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미힐미와 닮은 듯 다른 <A씨에 관하여> (하)

꽤나 괜찮은 반전, <고래를 찾아서>

 

두 번째 Chapter는 기억을 찾는 연인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앞의 <개를 찾아서>보다 짜임새 있었고, 후미에 반전까지 있어 앞선 이야기보다 흥미롭게 느껴졌다. 오후가 되면 기억이 과거로 돌아가는 유소현과 그런 그녀를 돌보는 이안의 일상은 곧 터지기 전의 폭탄과 다름없다. 과거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여자와 그런 그를 돌보는 남자 사이의 갈등은 치유의 과정에서 심화되고 폭발한다.

소현의 하루는 다층적이다. 오전에는 스물넷, 오후에는 스물셋, 저녁에는 고등학생으로 살아간다. 부모가 모두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에 소현을 돌봐줄 이는 그녀의 연인 이안밖에는 없다. 이안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소현의 병을 고치려 하지만 소용없다. 기실 그녀의 병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 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한 날 소현은 부모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고,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소현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밤이 되면 그녀의 방엔 물이 차오른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고래를 본다. 그게 환상인지 실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연인 이안에게 이야기를 하려 하지만 믿어주지 않을까봐, 자신의 병이 더 심화된 건 아닌지 오해할까봐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고민 끝에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 이안은 믿는 눈치가 아니다. 그런데 이안의 행동이 어딘가 의심스럽다. 가끔씩 방에서 홀로 울음을 터트리곤 한다. 이안 역시 소현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현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내막은 드러난다. 상담 과정에서 이안은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소현은 그런 이안에 대해 분노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둘은 함께 고래를 마주한다. 다소 급작스럽게 갈등이 봉합되는 감이 있지만 이야기의 끝은 또 하나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소현뿐만 아니라 이안 역시 나이를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 이안과 소현이 사실은 70세 노인이라는 것이다. 군데군데 이안을 노인으로 암시하는 장면들이 있지만, 눈썰미가 좋지 않은 이상 그냥 넘어갈 법한 복선이라 반전의 효과는 크다.

 

쫓기는 남자의 <Train ticket>과 없으면 더 좋았을 <epilogue>

 

세 번째 이야기는 판타지에 가깝다. 정신을 차린 한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기차표. 남자는 직감적으로 기차를 타야만 할 것 같다고 느낀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나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쉴 새 없이 변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우 계단을 내려온 그를 두고 기차는 매몰차게 떠나 버린다.

 

다음날 역시 반복이다. 일어나보니 또 다시 기차표가 주머니에 있다. 이번엔 좀 더 빨리 내려가서 기차를 타야겠다고 다짐한다. 계절은 여지없이 변한다. 남자는 이윽고 기차 앞에 도착한다. 그런데 기차에 타 있는 사람들 표정이 기묘하다.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다. 탑승객 중엔 남자의 친구 이태도 있다. 반갑게 말을 걸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든다. 그 순간 한 남자가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남긴다.

 

“환상 속에서 살고 싶다면 이 기차를 타고 현실에서 살고 싶다면 타지 마세요.” (377쪽)

 

남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기차는 떠나버린다. 왜 방해했냐고 화를 내려는 순간 남자는 사라진다. 남자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그는 기차표를 찢어버린다. 이윽고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그를 덮친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다. 간호사 말로는 2년 만에 의식이 돌아왔단다. 치료비는 A씨라는 사람이 그간 지불했다고 말한다.

 

<epilogue>에서는 A씨의 정체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세 이야기에서 갈등을 풀어내는데 도움의 손길을 준 A씨. 사실 ‘A씨는 항상 같은 사람이 아니며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 A씨의 답이다. (412쪽) 그 말은 누구나 A씨가 될 자격이 있으며 A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솔직히 이 대목이 너무 친절했다. 차라리 작가가 A씨의 정체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거기에 덧붙여 독립적인 이야기 3개가 A씨라는 조력자에 의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을 그리 강하게 받지도 못했다. 각각의 이야기는 모두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의 이야기이기에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조금씩 어긋나서 그런지 따로 노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현서라는 작가의 차기작은 기대된다. 단지 그녀의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다. 그녀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다. 400여쪽의 장편소설임에도 술술 읽혔다. 좋은 문체를 무기로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다만 다음 작품은 좀 더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작가만의 색깔이 좀 더 짙어졌으면 한다. 소설이란 결국 자기 내면의 이야기라 했다. 앞으로 그녀가 겪고, 펼쳐나갈 세계가 사뭇 궁금하다.

 

*사진 출처: 도서출판 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