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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장수상회>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α

*두 가지 요청을 받았습니다. 블라인드 시사회 관련 내용을 삭제해달라는 것과, 스포일러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자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후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해당 내용을 지우기로 했으나, 전자에 대해서는 <장수상회> 측의 권고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언급한 블라인드 시사회는 <장수상회>가 아니라 다른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월권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서는 영화 내용 관련해서만 발설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뿐, 블라인드 시사회 자체에 대한 언급을 삼가달라는 요청은 없었습니다. 같이 갔던 지인들도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만약 해당 영화(찾아보니, <서부전선>이라는 영화입니다.) 관계자 측에서 그런 요청을 재확인해주는 경우에 한해 블라인드 시사회 관련 내용을 지울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관련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다시 댓글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 블라인드 시사회란 걸 경험했다. (<장수상회>는 아니었다.) 시사회야 몇 번 가봤지만, 블라인드 시사회는 난생처음이었다. 블라인드 시사회에서는 촬영은 끝마쳤지만, 편집, 음향 등의 작업을 마무리 하지 않아 구색을 갖추지 않은 상태로 영화를 상영한다.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은 간단한 설문조사와 영화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야 한다. 


  

재밌었던 건, 설문조사지라는 게 영화의 매 씬을 번호로 달아 나열하고 그 옆에 적힌 1~5점(높을수록 재미있음)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이뤄져 있었다. 그 의도야 명약관화다. 각 씬에 매겨진 점수를 기준으로 영화의 편집 방향을 결정하는 것. 점수가 높은 씬은 살리고, 점수가 낮은 씬은 지우기. 단순히 영화에 대한 흥미도가 궁금했다면 굳이 씬을 나눠 설문지를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일부분 영화 제작에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야흐로 영화에서 제작자와 향유자(수용자)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다. 
 
이러한 경향은 얼핏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뚜렷이 구분되어왔던 제작과 향유가 뒤섞인 것은 사회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진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강조했듯 그러한 ‘현상’ 이면에는 무엇이 자리하는가. 무엇보다 완고한 자본주의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점차 영화 제작과 배급에 뛰어든 대기업들이 영화 산업을 잠식하고 있다. (경제학의 논리에 따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인’ 기업은 영화를 통해 오로지 (영화 제작의 높은 고정비용 때문에 영화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조절하긴 어려우므로, 비용은 차치하고) 수익을 최대화하려 할 것이다. 수익은 어디서 나오나. 바로 관객, 즉 수용자에게서. 수용자의 반응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경향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진보적인 뉘앙스를 품은 현상 이면에는 자본주의라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장수상회>에 대한 글을 현재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얘기로 시작했던 것은, 역설적이지만 글의 길이를 줄이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위의 논의를 조금만 더 연장해보자. 무엇보다 향유자(즉 대중)의 반응에 노심초사하는 현재 (특히) 한국 영화산업은 아무래도 대중성을 좇을 수밖에 없다. 그 외 다른 모든 가치는 논외다. 즉,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대중성을 침해하면 곤란하다. 개인적으로 <국제시장>(윤제균, 2014)은 최근 이러한 흐름과 지향의 총체적인 표상이었다. 그러한 영화들에서 내가 느꼈던 실망은 물론 감독 개인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현재 진행 중인 한국 영화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다.

 

한참을 에둘러 내가 정말 하려 했던 말은, <장수상회>는 별로였다. 하지만 여기서 ‘왜 별로였던가’에 대한 얘기를 하진 않을 것이다. 입(엄밀히는, 손) 아프니까. <장수상회>의 단점은 이미 최근 한국의 대중적인 영화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말하자면 한국 영화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몇 개만 나열해보자. 장르의 파괴(모든 장르적 요소들이 꼭 하나씩은 등장한다. 특히, 작위적인 코믹), 과잉된 캐릭터(말하자면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뚜렷하다. 그리고 꼭 그 캐릭터를 상징하는 지시대상이 등장한다.), 파편적이고 독립적인 사건들의 연속. 이 글에서는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지우고, <장수상회>라는 영화 그 자체만을 다뤄보려 한다. 그러므로 아래 전개될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글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장수상회>는 ‘별로’였다. 
 
1. 핵심은 반전  
 

<장수상회>는 크게 반전 이전과 이후,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만큼 영화의 반전은 강렬했다. 서사적으로도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반전에 이르러서야 앞 부분에서 품었던 의문들이 일거에 해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뒤늦은 이해: 점프컷과 객관적 시선으로서 쇼트
 
카메라를 의식하고 봤다면, <장수상회>의 전반부의 카메라는 일반적인 영화 문법과는 다르거나 혹은 과잉되었다는 것을 눈치 을 것이다. 우선, 점프컷이 과하게 많았다. 점프컷이란 말 그대로 ‘점프한 컷’이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금님(윤여정 분)의 고희연. 성칠(박근형 분)의 시점 쇼트에서 금님과 남자(금님에게 도련님)는 건물 밖에서 말다툼한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고희연은 이미 끝나있다. 건물 밖에서 성칠은 남자에게 금님을 그만 괴롭히라고 성질을 부린다. 이 두 쇼트 사이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뛴 채, 즉 ‘점프’하여 컷되어있다. <장수상회>의 전반부에는 이러한 점프 컷들이 수없이 많다. 점프컷이 그렇듯, 이로써 영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또한, 두 인물의 대화 씬에서는 꼭 객관적인 시선을 담은 쇼트가 삽입되었다. 예컨대 성칠과 금님이 대화를 할 때, 한 번은 성칠의 어깨너머로(즉, 오버 더 숄더 쇼트로) 금님의 얼굴을 잡아 성칠의 시선에서 금님을 담았다면, 다음 쇼트에서는 금님의 시선에서 성칠을 담은 쇼트가 배치된다. 그런데 이러한 쇼트/리버스 쇼트 중간중간, 이 두 인물을 동시에 담는 쇼트가 삽입된다. 보통 마주 보는 두 인물을 측면에서 잡는다. 그 쇼트는 성칠이나 금님 둘 중 하나의 시선이 아니다. 차라리 그 둘을 멀리서 방관하고 있는 제3자의 시선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쇼트는 객관적인 시선을 함축하는 것이다. 둘의 대화 씬에서는 어김없이 객관적인 시선으로서의 쇼트가 삽입되었다. 순서나 횟수는 다르지만, 도식적으로 ‘쇼트/리버스 쇼트/객관적 쇼트’의 삼각형 구도를 띈다. 

 

이러한 두 특징은 전반부 내내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전자는 단순히 영화의 속도를 빨리해서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으며, 후자는 전반부의 매우 짧은 컷들을 이어붙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삽입한 하나의 쇼트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반전 이후 내 생각은 뒤바뀌었다. (영화를 못 본 사람이라면 아래 전개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점프컷의 예시로 들었던 씬으로 돌아가 보자. 두 쇼트 사이에서 점프된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오인했듯, 정말 감독 마음대로 싹둑 자른 것일까. 차라리 애초에 그 사이는 공백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띄엄띄엄. 두 종류의 시간 사이의 처절한 역학이 점프컷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객관적 시선으로서의 쇼트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성칠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하는 ‘쇼트/리버스 쇼트/객관적 쇼트’의 순서에서 첫 번째 쇼트(즉 성칠의 시선)를 보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금님의 시선으로서 두 번째 리버스 쇼트? 하지만 그건 성칠의 존재를 보증할 뿐이다. 그렇다. 세 번째 쇼트, 즉 두 인물을 모두 담은 객관적 시선으로서의 쇼트야말로 첫 번째 쇼트(물론, 두 번째 쇼트도)를 보증한다. 말하자면 점프컷과 객관적 시선으로서의 쇼트는 각각 반전을 형식적으로 표현하고, 반전으로 야기되는 공백(곧, 영화의 내러티브)을 메우기 위한 지극히 영화적인 수단이었던 셈이다.   
 
- 두 번의 반복: 반전의 시선을 공유하기
 
반전 이후, 전반부에서 의미를 잃고 부유하던 요소(복선)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다. 성칠의 자해, 여정의 고통, 장수(조진웅 분)와 성칠의 오묘한 관계, 민정(한지민 분)의 알 수 없는 차가움 등. 비로소 맥락을 되찾은 요소들은 후반부에서 일목요연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좀 새롭다.
 
반전 이후 앞서 제시했던 복선들을 반복함으로써 재확인하는 과정은 (친절한) 반전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한다. 대부분 반복은 플래시백으로 이뤄진다. 반전에 앞서 이미 등장했던 장면들을 그대로 반복한다. 하지만 <장수상회>에서 반복되는 장면은 플래시백이 아니다. 반전이 드러난 이후에 복선들을 새로이 하나하나 ‘재현’한다. 둘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반전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아래 문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리라 믿는다.
 
과거를 마주하는 성칠의 시선. 거기서 그는 과거를 눈앞의 현실로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이다. 플래시백이 아니라, 새로이 재현되는 복선들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 새로운 과정을 통해 성칠만의 시선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로맨스? 스릴러?
 

위에서 강조했듯, <장수상회>의 핵심은 반전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오로지 반전을 향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장수상회>는 이상하게 ‘로맨스’ 영화로 잘못 회자되고 있다. 금님과 성칠의 애정과 애틋함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로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반부는 차라리 스릴러에 가깝다. 성칠과 금님의 로맨스 씬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중간중간 알 수 없는(위에서 표현했듯 ‘의미를 잃고 부유하는’) 씬들(이를 ‘스릴러 씬’이라 부르겠다.)이 짤막하게 삽입된다. 거기서 성칠을 둘러싼 모든 이들은 마치 악당처럼 묘사되고 행동한다. 특히, 몇 번 등장한 장수와 금님의 대화에서 드러난 금님의 이중성에 나는 몸서리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로우 앵글 쇼트(아래서 위를 향해 찍은 쇼트)가 몇 번 있었다. 로우 앵글 쇼트는 대상의 모습은 낯설게 보여주며, 다소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 성칠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로우 앵글 쇼트는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쇼트에 삽입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장수상회>에서 양적으로는 로맨스 씬이 압도적이지만, 오히려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스릴러 씬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후자는 반전의 강렬한 효과를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재개발’이라는 소재가 그렇다. 재개발은 (불완전한) 맥거핀이다. 맥거핀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소재를 말한다. 재개발은 스릴러 씬을 스릴러 씬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 내러티브를 진실에서부터 멀어지게 하는 강력한 유인에 불과하다. 전반부에 성칠을 둘러싼 인물들의 ‘음모’가 후에 밝혀지는 진실과 달리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재개발’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재개발은 얼핏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 요소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재개발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재개발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반전 이후, 그러니까 재개발이라는 소재의 ‘진정한’ 역할이 끝난 뒤에 재개발은 불필요해진다. 재개발 문제가 너무 싱겁게 해결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결국, 이 영화의 핵심은 로맨스 씬이라기 보단 스릴러 씬이다. 반전 이후 스릴러 씬이 사실상 스릴러가 아니었음이 밝혀지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후반부에서 스릴러 씬은 엄연히 거짓으로서 존재한다. 반면에, 로맨스는 그마저도 (보면 알겠지만) 다른 코드로 희석된다. 최종적으로 영화 내내 남아 있는 건 ‘거짓임이 드러난’ 스릴러 씬들이 전부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