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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리바이어던> 불가항력으로서 리바이어던이란?

<리바이어던>에 대해 얘기할 때 굳이 홉스Th. Hobbes가 인용될 필요는 없다. 달리 말해, <리바이어던>은 단지 국가 권력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물론, ‘리바이어던’하면 우선 홉스가 떠오르고, 자연스레 권력을 위임받은 강력한 국가의 비유적 형상(작은 인간들로 구성된 거인)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나 비유로서의 리바이어던은 사실 홉스의 주석 혹은 해석이다. 무시무시한 괴물로서 리바이어던 그 본래의 형상은 성경 몇 군데(특히 <욥기>)에 드러나 있다.

리바이어던의 본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간략히만 <욥기>를 살펴보자. 욥은 신을 충실히 섬기고, 죄를 짓지 않으며,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다. 그때, “욥의 신실함은 그저 그의 풍족함 때문”이라고 사탄이 도발하자, 신(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기에 이른다. 끔찍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욥은 고통스러워하며 신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에 등장한 신부의 말마따나, 욥은 “왜 하필 나인가?”하는 의문을 떨치지 못한다. 그때 신이 욥의 눈앞에 직접 현현하여 말씀한다. 리바이어던은 바로 그 말씀 중에 등장한다. 신은 같은 맥락의 물음을 여러 형태로 반복하지만, 한 마디로 축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리바이어던과 같이 크고 무시무시한 괴물을 네가 제어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은 곧 인간의 영역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이며, 동시에 신의 영역을 각인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서 리바이어던. 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계기로서 리바이어던. 영화 <리바이어던>에서 리바이어던을 얘기한다면, (홉스의 주석이 아닌) 이러한 일차적 의미에서여야 한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의 리바이어던은 또 <욥기>의 리바이어던과 그 의미가 다르다. 그렇다면 <리바이어던>에서 리바이어던이란 무엇인가?

 

일단, 왜 홉스의 리바이어던, 즉 국가 권력의 비유로서 리바이어던을 언급하는 것이 적확하지 않은 걸까. 물론,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것은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시장 바딤(로먼 마디아노브 분)과 일개 개인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 분)의 대결구도다. 부당하고 탐욕스러운, 하지만 압도적 힘을 가진 바딤에 대항하는 콜랴는 처참히 무너진다. 마치 시험에 든 욥처럼, 콜랴는 그를 둘러싼─말 그대로─모든 것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영화를 국가 권력과 개인의 관계로만 설명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혹은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예컨대 릴랴(엘레나 랴도바 분)와 드미트리(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 분)의 바람, 아들 로마와 릴랴의 갈등 관계 등. 영화 중반에는 바딤과 콜랴의 갈등 양상보다는 오히려 릴랴와 드미트리의 외도와, 그로 인한 갈등이 주를 이룬다. 사실상 한동안 바딤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에서는 단순히 권력과 개인의 대결만을 이분법적으로 볼 게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한 갈등과 심리를 눈여겨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영화에서 리바이어던을 일종의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말은 곧─이건 <욥기>와의 차이점이기도 한데─‘신의 부재’와 다르지 않다. <욥기>로 돌아가 보자. 욥기에서 리바이어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러므로 인간을 벗어난 존재(성경에서는 하나님)만이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얘기다. 신의 존재를 믿는 이에게 리바이어던은 일종의 ‘신의 영역’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 리바이어던이란 ‘불가항력’이라는 현상이다.

‘불가항력’과 ‘신의 영역’은 결국 모두 ‘숭고함’이다. 엄청난 높이의 파도를 봤을 때, 혹은 압도적인 높이의 산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 거기서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상상한다(혹은 그럴 수 있다). 그건 신일 수도 있고, 막연한 불안일 수도 있다. 결국 ‘숭고함’은 근본적으로는 주관적인 감정인 셈이다. 어쨌든, 둘이 숭고함의 다른 표현이라면 불가항력과 신의 영역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불가항력 혹은 신의 영역을 마주한 인간의 심리에 달려있다. 전자는 불안이며, 후자는 만족이다. 전자는 콜랴가 릴랴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돼 심문받는 중 엉엉 울며 내뱉었듯 “아무것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욥이 신에게 말하듯,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욥 42:5)는 것이다. 전자는 신의 존재에 회의를 품으며, 후자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예컨대 처치 불가능한 사건을 마주했다고 치자.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을 믿는 이에게 그건 명료한 신의 뜻이다. 눈앞의 사건은 그에겐 무질서에 불과하지만, 그가 믿는 신의 세계에서 그것은 질서다. 그러므로 그는 잠자코 눈앞의 무질서를 관장하는 신을 섬기면 된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이라면 눈앞의 무질서는 말 그대로 카오스에 불과하다. 명료한 거라곤 하나도 없으며, 그는 다만 좌절하며 카오스의 늪에 휩쓸릴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신부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욥기>의 마지막은 신과 욥의 대면과 화해지만, <리바이어던>의 마지막 씬은 무너진 콜랴의 집 위에 건설된 성당에서 연설하는 신부의 모습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즉 불가항력으로서 리바이어던을 감당하지 못하는 콜랴는 여러 번 신을 찾는다. 하지만 욥과 달리 그는 신과 대면하지 못한다. 다만 신부를 잠깐 만날 뿐인데, 그는 단지 <욥기>를 얘기해줄 뿐이다. 거기다 바딤의 후원을 받는 신부는 얼마나 세속적인가. 혹시 콜랴의 비극적 결말은 신의 대리인이랍시고 외려 신과의 대면을 가로막는 신부라는 존재 때문은 아닐까. <욥기>의 결말과 대조적인 영화의 마지막 씬은 그러한 의문을 남긴다.

지금까지 콜랴를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나머지 인물들의 심리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릴랴에게는 드미트리와의 외도, 그리고 발각, 콜랴의 미적지근한 용서, 로마와의 반목이 리바이어던이었을 것이며, 로마에게는 콜랴와 릴랴의 재혼, 새엄마라는 존재, 콜랴와 릴랴의 섹스, 거기서 드러난 콜랴의 비굴함, 릴랴의 죽음과 콜랴의 체포가 리바이어던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바딤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불안해한다. 일 년이나 남은 선거를 걱정하고, 자기의 권력을 잃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는 신부를 후원하며 신을 믿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탐욕으로 가득 찬 그에게 신이 들어갈 자리는 결코 없다. 바딤에게도 단지 불가항력으로서 리바이어던이 있을 따름이다.

 

* 사진 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