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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여우주연상의 그녀, 천우희의 영화 <한공주>

나는 <한공주>와 <도가니>를 비교한다든지, 한공주를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든지 하는 얘기들을 선뜻 이해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감정의 과잉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그걸 분노라고 생각진 않았다. 누군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대체 어떤 인물에게 분출해야할지 몰라 답답했노라 말했다. 당연하다. <한공주>는 결코 고발영화가 아니니까.

<한공주>는 밀양 성폭행 사건을 재구성하여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 "소녀가 포기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감독의 작의(作意)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입니다' 라는 흔한 문구조차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공주>는 허구와 실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지 않다. 감독은 이 영화가 단지 허구로 읽혀도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감독이 구성한 픽션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영화에서 '재'구성된 공주(천우희 분). 영화 속 그녀의 시간들. 그리고 그녀의 시간을 공유하는 우리의 감정에.

처음부터 영화는 불친절하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불편하다.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나직이 말하는 공주가 등장하는 첫 씬. 이후 계속해서 쏟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공주는 다니던 학교에서 나와 어렵사리 다른 학교에 입학한다. 새로 구한 집이란 곳은 이전 학교 선생님의 어머니(이영란 분) 집이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하는 질문이 들어 찰 틈도 없을 만큼 공주의 서사는 숨 가쁘다. 공주는 그런 서사의 무지막지한 흐름에도 별 다른 동요가 없다. 공주는 어딘가 음울해 보이지만, 또 웬 종일 주눅 들어 있지만도 않다. 이런 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들이 버겁게 진행되는 와중에 불현듯 공주의 과거 씬으로 이루어진 플래시백 장면이 삽입된다. 불가해한 사건들의 연쇄 뒤에 오는 이 플래시백은 앞선 '현재'의 상황에 대한 친절한 연결고리로서 제시되는 것일 테다. 드디어 관객들은 공주의 현재 서사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좀 의아하다. 플래시백은 플래시백인데, 이게 플래시백인지 아닌지 확연히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재 서사와 마찬가지로 플래시백마저 불친절하다. 공주의 외양이나 옷차림새, 촬영기법은 물론이거니와 우울의 심연을 어딘가 가득 감춰둔 듯한 감정선 마저 플래시백(그러니까 성폭행 이전)과 현재 시점(성폭행 이후)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플래시백을 대하는 관객들은 조금씩 늦되고, 꼭 그만큼 현재의 공주와 플래시백의 공주 사이의 경계는 흐트러진다.

플래시백 자체는 또 어떤가. 짧은 씬들이 파편적으로 현재 사건 중간 중간에 던져진다. '던져진다'는 건 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플래시백은 현재 공주의 서사에 최선을 다해 몰입하려는 관객의 눈앞에 툭- 던져진다. 그것도 아무 예고도 없이. 불친절하니 짤막짤막하게. 그리고 잊을 만하면 다시, 다시, 다시. 반복적으로. 그렇다면 플래시백은 영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일 영화가 정말로 밀양 성폭행 사건을 고발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면, 가장 중요한 플래시백 장면이 왜 그렇게까지 모호한가. 세세히 잘려 반복되는 플래시백은 또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다시, 이 영화의 초점은 현재의 공주에 있다. 개인적으로 플래시백이 이 영화에서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성폭행 이전을 다루는 씬들은 죄다 불가피하게 넣은 셈이다. 현재의 공주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플래시백, 말하자면 밀양 성폭행 사건.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영화가 보이는 방식이 그렇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플래시백이 불친절한 까닭은 뭐란 말인가. 왜 현재의 공주와 과거 공주 사이의 경계는 흐릿하며, 과거의 사건들은 예고도 없이 불쑥 불쑥, 답답하게 내던져지는가. 영화는 현재의 공주에 집중한다. 영화는 굳이 성폭행 사건이라는 지류(支流)를 보여주기 위해, 현재 공주의 서사라는 주류(主流)와 만나는 지점의 소용돌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건 영화에서 공주는 과거에도 현재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주가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건 아니다. 이 두 문장은 엄연히 다르다. 과거-현재가 아니라, 현재-과거. 순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역행(되어야만) 하는 시간. 주류와 접하는 지점에서부터 지류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온전히 제시되지 않는 과거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현재 서사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사건에 함몰되지 않는 것. 한 번 되돌아간 과거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현재의 공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이런 영화의 구조 앞에서 관객들은 어떠한가. 공주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리고 그녀에게 느끼는 우리의 무지막지한 감정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또 다른 의미의 플래시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번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서사의 플래시백에 대하여.

 

공주는 '선생님 어머니' 집으로 이사를 간 뒤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다. 감독은 수영을 배우는 장면을 상당히 많이 할애했다. 또한 지나치게 친절하다. 수영 강사로부터 숨 쉬는 법을 배우는 장면에서 '숨을 안 쉬면 죽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장면. 별다른 성과 없이 지지부진 헤엄치는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장면들. 도대체 수영 씬은 무엇인가. 다른 건 다 불친절하면서 수영 씬은 왜 또 그렇게 과하게 친절한가. 영화 끝 부분에서야 단서가 나온다. 공주에게 수영이란 살고 싶어졌을 때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엔 물에 빠져 자살한 화옥(김소영 분)이 물에 빠진 직후 자살을 후회했을 거라는 공주의 추측과, 그러므로 자기는 화옥과 달리 이 지리멸렬한 세상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리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면서 맨 처음 숨 쉬는 방법부터 배우는 씬으로. 숨을 안 쉬면 죽는다는 말을 마치 말을 처음 배운 아이에게 타이르듯 가르치는 강사의 태도와, 한껏 진지하게 대답하며 경청하는 공주. 애초에 수영은 끔찍한 과거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생의 학습이자 몸부림인 셈이었다. 플래시백으로서의 '현재'에서 우리의 기대는 이런 식으로 어긋난다.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온 공주의 현재 서사에서야 비로소 어떻게 처참히 밟힌 그녀의 꿈(노래)이 비록 잿빛일지라도 꿈꾸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영화의 끝부분에 와서야 공주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가능케 하는 지점(=모든 현재 사건들이 플래시백으로 작동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플래시백은 위에서 살폈듯 성폭행 이전을 다루는 영화적 장치와는 달리, 컴컴해진 스크린 앞에 남겨진 관객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순간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공주의 벅찬 슬픔을, 아픔을 공유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렇지 못했다. 투박하지만 공주를 챙겨준 '선생님 어머니'나, 끝까지 공주를 응원했던 은희(정은선 분)도 성폭행 사실을 대면한 뒤엔 공주를 붙잡지 못했다. 그네들은 아마 공주의 아픔을 온전히 떠안지 못하리란 걸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나라면 영화 속 공주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물론이다. 왜냐하면 공주를 위하던 어떤 이들(물론, 영화가 끝나기 전의 나도 포함하여)도 몰랐지만 공주는 처음부터 살고자 노력했다는 걸 나는 이제 깨달았으니까. 숨 쉬는 법까지 다시 배워가며 절대 자기는 죽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공주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영화가 끝난 뒤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영화가 끝난 뒤에나 공주를 붙잡으리라 다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의 모든 다짐들은 이미 끝나버린 영화 속에 부채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느낀 알 수 없는 감정은 다름이 아니라 과거가 되어버린 (영화의) 현재 서사에 남겨놓은 부채의식일 테다. 그 오묘한 감정은 누군가 말했듯 도대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건 오로지 영화(의 구조) 탓이니까. 영화에 두고 온 부채를 갚을 길이 없는 한(과거가 된 현재를 현재가 된 과거로 바꿀 수 없는 한, 말하자면 영원히) 이 과잉된 감정의 결말은 해소되지 못하거나 잊히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따름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