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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설 연휴 가족영화 추천 3편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혹은 제도에 대해 생기는 반감은 어쩔 수 없다. 특히 허울만 남은 명절이라면 이제 질색이다. ‘명절’에 대해서 빨간 날이라는 것 말고 좋아할 이유를 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밸런타인데이 전날, JTBC 뉴스룸에서 어떤 설문 조사 결과를 언급했다. 대략 “무슨 무슨 ‘데이’들이 사라지기 바라냐”는 물음이었는데, 남자 90%, (예상 외로) 여자 70%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다음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동안 초콜릿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갔다. 덕분에 나는 계산하는 기계가 되었다. 명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마 설문조사를 해도 위와 유사한 결과가 나오리라. 하지만 존재하는 ‘데이’들도 외면하지 못하고 몇만 원짜리 초콜릿을 사다 건네는데, 역사와 전통이 훨씬 오래된 명절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다수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작년 추석이었나. 심지어 어떤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며느리용 가짜 깁스를 팔기도 했다. 차례상은 간소화될 대로 간소화되기도 하고, 아예 외국 여행 중에 잠시 컵라면 앞에 절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단위로서, 그 안에서 이리저리 충돌하고 화해하는 관계로서 가족이라면 환영이다. 이번에 기획한 ‘지극히 주관적인 설 연휴 가족영화 추천 3편’은 정확히 그러한 의미에서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중심이지만, 피 섞인 가족이 다른 관계보다 우선한다든지, 가족은 늘 행복하거나 행복해야 한다든지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기서 가족은 불안정하고, 흔들리며, 결국 화합하더라도 뭔가 갸우뚱하다. 결국, 가족이란 사람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와 다르지 않다. 가족이란 특별할 순 있지만, 절대 유일하지 않다.

 

아래 다룰 세 편의 영화들을 모두 그런 식으로 가족을 다룬다. 그러니까 가족이 다 모이든, 다 못 모이든, 혼자이든지 간에 상관없다. 영화를 통해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으신 분들은, 긴긴 연휴 동안 참고하시길. 

 

1.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 눈빛 하나로 기억되는 영화

 

여러분은 인물의 눈빛 하나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으신가. 내게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크레이머)에서 테드 크레이머(더스틴 호프만 분)의 눈빛이 그랬다. 영화를 본 지 십 년이 다 돼간다. 그때는 고딩이었고, 영화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영화는 그저 킬링타임용에 불과했다. 수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수많은 영화들이 잊혔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그 당시 보았던 영화 중에 (특히 구체적인 장면이)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다. 그건 전적으로 더스틴 호프만의 눈빛 덕이다.

 

그렇다고 내가 더스틴 호프만이라는 배우를 좋아하진 않았다. <레인맨>(배리 레빈슨, 1988)에 출연한 연기 잘하는 배우,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므로 내가 영화 내내 그의 눈빛에 홀려있던 건 아니었다. 단 한 장면에서였는데, 테드가 아내 조안나(메릴 스트립 분)과 법정에서 마주한 씬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갔던 조안나는 갑자기 돌아와 자기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테드와 조안나는 양육권 분쟁에 들어간다. 여기까지 말한 설명에 따르면, 분명 법정에서 조안나를 향한 테드의 눈빛은 싸늘하고 증오에 가득 차 있을 거라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정반대였다. 법정에서 진술하는 중 눈물을 참지 못하는 조안나에게 테드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욕심 없고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사실 이 영화는 분명 ‘가족 영화’다. 하지만 내게 <크레이머>에서 가족은 중요치 않았다.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가 ‘부성애’였는데, 나는 심지어 아들인 빌리 크레이머(저스틴 헨리 분)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도 마찬가지. 오히려 나는 어쩌면 이미 남이 되어버린, 즉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벅찬 울림을 느꼈다. 아, 그 이후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더스틴 호프만의 눈빛을 훔치려 했던가. 결국, 실패했지만.

 

2.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

 

몇 년 동안 아들인 줄 알았던 아이가 사실 남의 아들이었다면? 영화는 이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대놓고 흔들고 있는 셈이다. 꽤 명료하게 정의된 가족의 외부는 얼마나 가까운가. 가족의 외부를 마주했을 때, 가족이라는 경계는 어떻게 흔들리는가. 가족이란 정말로 뚜렷이 구분 지어질 수 있는 단위인가?

 

영화는 이런 의문들로 가득 차 있다. 제목부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다.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된다’면 결혼해서 애를 낳는 과정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 씬부터 기대를 저버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될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 분)는 이미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다. 이후 스토리는 위에서 말한 그대로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허삼관>(하정우, 2015) 전반부와 유사하다. 료타는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 분)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다. 진짜 아들과 가짜 아들을 바꿔보기도 한다. 그 와중에 료타는 수없이 많은 갈등과 오해, 그리고 좌절을 겪는다.

 

그렇게 료타는 아버지가 된다.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누가 봐도 영화 초반의 료타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것은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고 하고 있는 셈이다. 우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건 말 그대로 ‘부자’관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들인 줄 알았던 존재가 사실 아들이 아니었고, 반대로 아버지인 줄 알았던 존재가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비로소 료타는 자신의 혈육을 찾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 그 이면에서 발생한다. 눈에 띄는 변화는 료타의 행동과 태도에서 일어난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기대를 은연중에 아들에게 강요하고 실망하던 영화 초반의 료타. 하지만 영화 내내 가족, 그리고 부자 관계에 대해 고심했을 료타의 그런 태도는 바뀐다. 이런 측면에서 감독이 말하는 ‘아버지’ 이름은 아버지로서의 자기 존재를 성찰한,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위에 대해 고심한 존재에 바쳐진다. 결코, 아버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3. 솔드 아웃 – 그렇게 해피엔딩... 잠깐!

 

<솔드 아웃>을 보신 분이라면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크리스마스 맞춤용 가족 영화가 아닌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우리나라에서도 크리스마스에 맞춰 몇 번 방영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아들 제이미(제이크 로이드 분)가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로봇 장난감 ‘터보맨’)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 하워드(아놀드 슈왈제네거 분)의 이야기다. 영화 제목처럼 ‘품절’된 장난감을 얻기 위해 하워드는 온갖 고생을 한다. 결국, 하워드는 제이미에게 원하는 장난감을 선물해주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는 결말보다는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춰봐야 한다. 그래야만 행복해 보이는 하워드와 제이미의 마지막 씬에서 왠지 남아있는 께름칙함을 이해할 수 있다.

 

‘치고 빠지기 전략’이라는 게 있다. 대다수 대중은 해피엔딩을 원한다. 현실이 시궁창인데 영화에서까지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감독도 (진짜) 건네고 싶은 메시지를 포기할 수 없다. 타협점으로 감독은 대중이 불편해할 만한 장치로 영화 중간에 치고 빠진다. 그것도 유머러스하게. 그렇게 되면 관객도 만족이고, 감독도 만족이다. 물론 메시지를 전했다는 감독의 만족은 자위(自慰)에 그치지만, 만족에 있어선 관객도 마찬가지니까.

 

<솔드 아웃>에서도 치고 빠지기 수법이 여럿 나온다. 그중에 마이런 라라비(신바드 분)의 존재가 눈에 띤다. 그는 계속해서 상품을 사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행태를 비판한다. 나름 그럴듯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덤이다. 하지만 흑인인 마이런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에서 그는 코믹함을 살리는 감초 역할에 불과하다. 관객 중 그 누구도 그의 메시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 과장된 표정, 말투, 제스처에만 몰입할 뿐. 그의 말에 담긴 메시지는 가볍게 흩날린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다소 무거울 법한 메시지를 가볍게, 그리고 치고 빠지기식으로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벌어지는 모든 갈등은 종국에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해소된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단지 유쾌하거나 흐뭇하지만은 않다. 어느 정도 치고 빠지기 전략이 통했던 것일까. 여러분들도 한 번 보시길 바란다. 그저 흐뭇한 영화였다면, 치고 빠지기 전략은 실패!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