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단막극 다시보기

[단막극 다시보기] 길어야 3개월, 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 곧 죽어>

대놓고 죽는단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아주 상투적인 죽음 선고를 받은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기대감을 드라마가 충족시켜줬기 때문이다. <나 곧 죽어>라는 제목에 반어적인 매력이 담겨 있었다.

스포일러를 당해서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막극은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통해 시청자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이 스포일러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 그것보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주인공이 삶을 정리하면서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을 유쾌하게 풀어가는 과정을 보는데 즐거움이 있다.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단막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 곧 죽어>는 전통이 있는 KBS단막극 시리즈, 드라마스페셜의 한 회분이다. 드라마스페셜은 2014년 11월까지 해마다 전통을 유지하며 이어졌다. 하지만 11월에 폐지가 결정되었고 단막극의 힘을 아는 PD들은 폐지 반대 성명서까지 냈다. 계속된 노력 끝에 KBS는 올해 1월, 다시 드라마스페셜을 부활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아주 반가운 결정이다.

 

또다시 이런 폐지 결정이 내려지는 걸 막기 위해 단막극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단막극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싶었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이유 없이 매번 쓰다듬고 싶은 그런 기분처럼 말이다.

 

<나 곧 죽어>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 드라마는 역시 결말이 예상되는 드라마다. 시작부터 주인공인 우진(오정세 분)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적금을 깨고, 썸 타던 사이를 정리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다. 그 이유가 왜인가 했더니 그는 길어야 3개월을 선고받은 췌장암 환자다.

 

어차피 죽을 인생, 맘껏 즐기다 가고 싶었다. 우진은 전 재산을 다 쓰고 가려는 마음으로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나간 첫사랑도 다시 만나본다. 이미 결혼했다는 그녀를 앞에 두고 그는 입 안에 ‘나 곧 죽어’라는 말을 계속 곱씹는다. 참고 참다 그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는 어이없게도 그녀의 내연남과 진짜 남편을 동시에 보는 4자 대면을 하면서 처참히 맞고 쫓겨난다. 씁쓸함과 코믹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방해하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우진과 같은 회사의 경리인 사랑(김슬기 분)은 그를 참 좋아한다. 이유도 없이 오빠, 오빠 하면서 쫓아다닌다. 이름도 사랑이다. 사랑이 넘치는 여자다.

 

더 이상 잃을게 없던 우진은 우발적으로 사랑에게 사귀자는 고백을 한다. 영문을 알 리가 없는 사랑은 그저 신날 따름이다. 그녀는 우진에게 지겹게 들러붙으며 잘 웃지 않는 우진에게 좀 웃으라고, 현재를 뜨겁게 살라는 말을 남긴다. 그녀가 마법을 부렸던 걸까. 그 때부터 우진은 조금씩 미소를 찾기 시작한다.

 

우진과 사랑은 점점 가까워진다. 사랑의 동네에 우진이 놀러가기도 하고 사랑은 우진을 웃음 치료하는 곳에 데려가 오늘내일하는 시한부 인생 아니면 웃음으로 병을 나을 수 있다는 웃픈 상황을 주기도 한다.

 

사실 사랑이 대책 없이 밝은 여자인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겐 걸을 수 없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동생에게 사랑은 바깥세상과도 같은 존재. 동생에게 좋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사랑은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우진과 나누면서 그는 계속 변해갔고, 사랑에게 마음을 열었다.

 

우발적으로 시작한 것이 진짜 ‘사랑’이 되면서 그들은 정말 몸과 마음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죽을 날을 받아둔 우진은 이별을 준비한다. 동시에 사랑은 우진이 오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랑은 그저 우진이 의사에게 진실을 듣길 바라지만 우진은 전 재산도 정리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랑에게 힘들 때 같이 있어달라는 이기적인 부탁만 한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두고 간 사랑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낀 우진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달려간다. 곧 죽어도 함께 하고 싶단다. 빌어먹을 췌장암만 아니었더라면 이라는 바보 같은 말만 남기며 말이다. 여기에 사랑은 웃음으로 답한다. 바보 같은 남자다. 그렇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자기와 같이 있어달라는 그가 참 사랑스럽다. 결국 두 사람은 터지는 불꽃놀이를 함께 보며 해피엔딩.

 

자신의 췌장암이 한 정신병자의 연극이었다는 걸 안 우진이 모든 걸 수습하는 과정도 흥미진진했다. 정신병자를 죽이려하고 알면서도 사기 당해 잃은 전 재산을 채우기 위해 달리고 있는 우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대신 그의 옆에는 새로운 연인,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흐르는 마지막 노래는 가을방학의 <취미는 사랑>, 완벽한 결말이다.

 

처음에 말했듯 드라마 <나 곧 죽어>는 무서운 제목과 달리 보는 내내 예상 하는 대로 진행 되는 것이 즐거웠던 드라마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호르몬이 어딘가에서 분비되는 기분이랄까. 74분이 아깝지 않은 행복한 드라마였다.

 

오정세와 김슬기라는 묘하게 어울리는 두 배우간의 화학작용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지질한 연기를 하는 순간에도 유쾌함으로 승화하는 오정세와 막무가내 여동생 같은데도 아름다움이 슬그머니 느껴지는 김슬기의 연기가 어우러진 덕에 드라마가 확실히 더 살아났다. 힘이 있는 배우들이라고 할만 했다.

 

단막극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70분 남짓한 시간에 기승전결을 모두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대사 한 마디에도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버릴 장면이 없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울림이 있다. 특히 미니시리즈에서 작가들이 쪽대본을 남발하며 이유 없이 과거 회상과 뮤직비디오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미 대본은 완성되어 있으며 제작진은 온전히 이야기를 이해하고 제작한다. 이것이 단막극에 매력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오래된 희곡을 보고 감동을 얻고,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연극을 다시 봐도 즐거운 이유와도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심각한 막장 사랑 이야기다. 그렇지만 전 세대를 거치면서 사랑받는 이유는 구성과 대사와 치밀한 갈등, 무엇보다 위대한 사랑이 죽음도 초월한다는 엄청난 진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 곧 죽어>에서도 아주 단순하고 보편적 진실이 담겨있다. 미래를 걱정하는 지구인보다 현재를 즐기는 외계인이 낫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