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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3인의 현상범들] #5 실패작 [소르피자.txt] 이것은 에어컨이다. 이것은 히터다. 이것은 둘 다 될 수가 있다. 지름이 30센티도 안되어 보여 약할 것 같지만, 이 작은 기계 하나만 건물에 있어도 모든 층에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을 제공해줄 수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기술혁신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그런 자가 있다면 더운 여름날 옥상에서 ‘사우론’을 닮은 메론 맛 눈깔사탕을 빨아먹으며 그 사탕이 입에서 녹을 때까지 엎드려뻗쳐를 하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호빗처럼 맨발로 63층 건물을 계단으로만 내려와야 할 것이다. 밑 부분은 왜 녹색으로 칠해져 있냐고? 아 그건, 여름이 너무 더워서 옥상에 있던 우레탄이 녹아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4 이름 없는 화가 [호래.txt] 술을 마셔서 정신이 조금 멍한 상태로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림에는 검은 선이 몇 개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르겠다. 섬 같기도 하고 산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육지 같기도 하다.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처럼 그림을 보고 있지만 사실 그림엔 별로 관심이 없다. 무엇을 그린 지도 알 수 없는 그림 따위 봐서 무얼 하나. 그냥 술자리엔 바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분위기 맞추며 앉아 있는 건 고역이다. 개새끼들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술을 마시면 나는 조금 더 감정에 솔직해 진다. 아니다. 지금 이 감정은 어딘가 과장된 면이 있다. 사실 걔네들은 나한테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3 말하자면 말입니다 [학곰군.txt]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버지였다. 나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되고 있니? 네? 그냥 그렇죠. 일부러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인다. 검은색. 아니 그보다는 흐린, 너무 많은 붓이 오고가서 이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물통의 색 같은 그의 얼굴이 있었다. 너의 쓰임이 있을 곳이 있을 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머리가 아버지의 그림자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영영 나오지 못할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벗어날 수 있을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세상에 쓰임이 있는 곳이 있을까. 아버지도 한 때는 가슴에 광활한 대지를 품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네 나이 때는 하늘을 품어도 모자라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잘 될 것이라는 말을 하며..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2 아버지를 위하여 [소르피자.txt]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색의 폰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수천 게임을 치러왔다. 많은 선택들이 그의 머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작한 지 세 번째 순서 만에 E7칸에서 나이트에게 잡혔던 기억,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의 흑색 퀸이 잡혔던 일, 상대편 진영에 끝가지 가서 백색 퀸으로 승급한 자신의 동료를 본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게임을 치러오면서 그는 지쳐버렸던 것이다. 게임을 이겨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기사를 위해, 주교를 위해, 여왕에게 길을 터주고 왕을 지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승급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순서는 그에게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게임에서 그는 드디어 상대방 진영에 도달한 것이었다. “어떤 것으..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호래.txt] 사실 너의 불행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어. 미안. 생각해보면 널 안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잖아.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도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들었겠다고 말할까.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지. 너는 그런 나의 태도에 실망했고. 하지만 사실 네 부모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기회조차 없었잖아.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내뱉으며 너의 한쪽 손을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그 위로의 말과 몸짓이 스스로도 너무 가볍게 느껴지면 어쩔까 두려웠거든. 원래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위로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왔어. 섣부른 충고는 주제 넘는 행동같고 기계적인 위로는 위선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사실 그리 큰 관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