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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아버지의 초상>, 아버지보다는 초상에 방점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래의 제목은 La loi du marche(시장의 법칙), 영어 제목은 The Measure of a Man(인간의 척도)다.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도대체 감이 오지 않는 단어들이 붙었다. 특히 ‘아버지’라는 지극히 감성적인 단어는 , 으로 이어지는 한국 특유의 신파적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의심했다. 영화를 보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은 도무지 이 제목으로 부를 수 없을 만큼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영화다. 주인공 티에리(뱅상 랭동 분)은 아버지다. 처음에 이 남자를 수식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단어를 붙여 준 것 말고는 더 이상 그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영화의 내용은 다른 부분에 집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인간의 초상을 다루고 있다. 즉,.. 더보기
<파리의 한국남자> 불편함에 대한 변명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아내를 찾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도대체 왜 그는 그녀를 찾아 헤매는 걸까? 가 던지는 질문이다. 부재는 곧 존재의 없음이므로, 다른 식으로 질문을 반복해볼 수 있다. 왜 그는 그녀와 사는가? 사랑해서? 계약한 관계니까?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감성, 이성, 도덕. ‘납득’할만한 대답들이 주를 이룬다. 소위 ‘대중적’인 영화들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고, 눈물 흘린다. 하지만 는 이 모든 ‘상식’적인 대답에서부터 자유롭다. 달리 말하면, 불편하고 불쾌하다.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고, 맥락의 끝마다 탈맥락적 과잉으로 치솟는다. 영화가 끝났는데 아무도 울지도, 웃지도, 심지어 욕을 하지도 않는다. 실소(失笑). 허탈한 웃음이 영화관 곳곳에서 터져 나.. 더보기
<이웃집에 신이 산다> 태초에 억압이 있었으니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태초에 억압이 있었다. 억압은 찰나에 모든 곳으로 퍼졌다. 억압은 무엇인가. 억압은 현상이다. 달리 말해, 시간과 그물의 불협화음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렇게 시작해보자. 태초에 시간이 폭발했다. 광포한 시간은 뒤를 제외한(하지만 시간이 부재하는데 뒤란 게 있을 리 없다, 아무튼) 모든 곳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 위로 그물이 깔렸다. 존재는 그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 촘촘히 짜인 그물은, 그러나 태초에 이미 짜여있었다. 그물에 대해 말하자면, 시작이 곧 끝이었다. 시간의 문이 열린 순간에 그물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물은 곧 존재였고, 존재는 그물로 하여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물은 언어로서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최초로 현현할 수 있었다. 끊어지지 않.. 더보기
<바닷마을 다이어리> 딱히 위로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가끔은 위로라는 말이 버거울 때가 있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슬픔이 닥쳤을 때가 그렇다. 시간이 흐르는 것만이 약인 그 순간, 어설픈 위로는 외려 독이 된다. 그럴 때 나는 침묵을 선택한다. 하지만 힘들어 하는 그 누군가의 옆에 머무른다.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하니까. 속 주인공 자매들은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딱히 건네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둘째는 첫째에게 맨 정신으로는 오글거리는 말을 못하겠다는 말도 한다. 낯간지러운 위로를 하기 어려운 사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상적인 말들이 어찌나 편안함을 안겨주던지. 는 만들어낸 위로 대신 자연스러운 평안을 전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남겨진 세 자매는 다행스럽게도 건강히.. 더보기
유쾌하면서도 불쾌했던 <내부자들>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연한 겨울이다. 벌써부터 거리엔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다. 집 앞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추운 날 가장 머무르기 좋은 장소는 (집을 제외하면) 영화관이다. 극장에서 연인의 손을 잡든,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가든, 그냥 팝콘을 먹든 관객의 시선은 스크린을 향한다. 각각의 주체가 철저히 독립적이면서도 같은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극장이다. 대개의 경우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시원섭섭함을 느끼게 된다. 꽤 오랜 시간 서사의 처음과 끝을 목격했다는 점에서 시원함을 느끼고, 그 서사가 현실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섭섭함을 느낀다. 은 후자가 좀 더 강할 것이라 예측했던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느낀 감정은 시원섭섭함이 아니.. 더보기
두 가지 질문을 던진 영화, <이터널 션사인> 10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라 떠들썩했지만, 어쨌든 내게는 처음 본 영화였으니까 별다른 선입견 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뿐인가? 미셸 공드리 감독의 전작도 보지 않았으니까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 새로운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의 로맨스 영화였던 만큼 설레기도 했다. 영화 초반 조엘(짐 캐리)가 출근하지 않고 뜬금없이 몬탁의 겨울바다로 향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하지만 영화 후반과도 맞닿아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한번쯤 그런 생각 하지 않는가. 정해진 궤적의 삶에서 벗어나 일탈을 맛보고 싶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별로 그런 선택을 했던 적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조엘이 기차에 몸을 악다구니로 밀어 넣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여하튼 누가 봐도 평범한 조엘과 누가 봐도.. 더보기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 당신의 위치는 지금 어디? “이 영화는 공감이 되지 않아서 별로였어.”만큼 난감한 평가도 없을 것이다. 그런 평가가 잘못 됐다는 게 아니라, 공감하고 말고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냐는 말이다. 누군가는 비행사의 삶을 다룬 영화를 보면서, ‘나는 비행을 해보지 않았으니, 저 이야기에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아.’ 영화티켓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쉴 수 있다. 반면에, 누군가는 재난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오줌 마려워 죽을 뻔했던 기억이 나네.’ 창백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감을 얻는 영화=보편적 주제를 담은 영화’ 혹은 ‘공감을 얻지 못한 영화=특수하한 주제를 담은 영화’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난니 모레티, 2015)에서 어머니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 숙고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린 램지, .. 더보기
<더 랍스터>, 사랑은 신기루인건가요? *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기루라는 것이 있다. 그럴듯한 개념 하나 소개하는 듯이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 중 신기루에 대해 모르거나, 신기루라는 이미지를 상상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다. 오아시스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여행자의 절규는 어릴 적 우리에게 철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했으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해 신기루는 가짜라기 보단 왜곡에 가깝다. 신기루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뿅! 하고 무엇이 생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신기루에 대한 정의는 ‘물체가 실제의 위치가 아닌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신기루란 목이 너무 말라 오아시스의 환영을 보는 여행자의 ‘망상’이 아니라, 어딘가에 무엇인가 있지만 불안정한 대기층에 의해 왜곡된 빛을 감각하는 여행자의 ‘착시’다.. 더보기
화성생존기에서 배우는 백수탈출기, <마션>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호평 일색인 영화를 뒤늦게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이 영화의 절반은 과학적 지식인데 과학과는 거리가 있는 내가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싶었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화성에서 고군분투하는 마크 와트니(멧 데이먼 분)가 취업 경쟁에 뛰어든 나와 내 주변 친구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적어도 처절함과 절박함은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과학 수식은 과감히 차치하고 그의 생존기에서 힌트를 얻어 백수에서 탈출하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얻어 보려 한다(스스로 위안 삼아보려 한다). 영화는 아주 짧게 요약 가능하다. 화성에 강력한 모래폭풍이 불면서 헤르메스호는 화성 도착 6일 만에 조기 귀환한다. 그 과정에서 와트니는 불의의 사고로 일.. 더보기
이선균 하나로 끝까지 가는 영화 <성난 변호사>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선균이 돌아왔다. 전작 와 유사한 풍의 영화인 로. 달라진 게 있다면 전작과는 달리 원톱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결국 영화의 성공은 조진웅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 넣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역할의 중심은 다시 이선균이다. 이선균은 “이기는 게 정의지”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변호사 변호성으로 분한다. 성난 변호사에 걸맞은 이름이다. 그러나 변호성은 능력 없이 성만 내는 변호사는 아니다. 첫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는 승소를 위해 감정이 아닌 논리를 앞세운다. 결과는 변호성의 승리. 피고였던 제약회사 로믹스의 문지훈 회장(장현성 분)은 그에게 또 다른 소송을 맡긴다.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회장의 운전기사를 변호하라는 임무다. 돈을 최고로.. 더보기